더 이상 왕모(王母. 고국원왕 왕모 朱씨)가 더 이상 볼모로 잡혀가 전략에 차질오게 할 수 없다란 뜻이겠지요.
이에 대해 증거하고 고구려에 대해 변명하고자 합니다.
왕이 분실자살한 적 있서요.
잠깐, 불교의 한 지파인 도술부리는 유마힐도란 거에 대해 조금만 소개하옵지요. 우리나라 사람은 너무(?) 똑똑하여 남보다 앞서 나가다 낭패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한예로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고구려 동천왕의 남다른 학문섭치욕구에 '유마경'에 흠취하다 변을 당한 사건이 나타났기 때문이지요.
유마경(維摩經)은 불가의 십대제자 승조(僧肇. AD 383~414) 때에 가서 해설서 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이 나오고 이 무술(巫術)을 습득하고 풀어먹는 도사에게 '존자(尊者)', '타(陀)', 또는 '제일(第一)'이란 존칭을 법명 뒤에 븥여줬는데 그 '승조 존자'보다도 훨씬 앞서 뭐라 말해야 되나요?
동천왕이 그 승조존자가 태어나기 146년 전에 설쳤다랄까, 말하자면 동천존자가 된 셈이지요. 이로인해 고구려 도읍이 한반도 내의 평양으로 옮기된 된 최초의 이유가 됬다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생각은 빠르게 하나 행동이 늦어야 하는 법! 이것이 순리가 아니겠서요?
평양으로 천도한 후 때가 이르자 망해버린 고구려 도읍지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쓸쓸한 생각을 한 분중에 최치원, 이 색, ..많이 계시지요.
그 분들 중에 대동강변 평양 유적지에 대해서는, 뜻을 이루지 못한 비범한 천재 계원 최치원 선생의 금오(金鰲)신화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극락과 지옥에 대해서도 하늘과 땅 이외에 또 다른 하늘과 땅이 있다는게 황탄하다 말하니까 스님의 대답은 "죄와 복은 지은데 따라 응보가 있다"는게 대답이었지요.
어엿거나 불교가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들어 온 때는 소수림왕 2년(AD 372)이 아니라 소수림왕 6대조 동천왕11년(AD 237. 재위 227-248)에 부하 삼태읍장(三太邑長)에게 명하여 위나라(공손연의 요동국 경계)에서 '유마힐도(道)'를 들여 올 때 성곽을 깨고 현현궁(峴晛宮)을 습격하여 46명의 추장 수(殊)를 사로잡고 그 마힐도 사원궁실에서 대략 133세의 종선(宗禪)도사로 하여금 경축행사를 올리고 고구려 땅으로 복속시키죠. 이 행사를 동천왕비가 주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위나라 반격 정시(正始) 전쟁(AD 246)으로 피신한 후, 책임을 통감한 동천왕이 자괴감으로 재위에 있으면서 중천왕에게 양위(246)하고 살신공양으로 자살(AD 248)한 사건이 있섰지요. 그리고 읍장, 백장(百長), 국수(國殊)의 정성으로 벽비(壁碑)를 세웠으니 그 원인은 현현궁 침탈과 동천왕의 유마힐경 도술에 지나치게 탐닉한 까닭이겠지요.
그 유마힐도(維摩詰道)는 도가(道家)의 도술을 피는 유마경(전).
도교가 고구려에 들어온 때는 영류왕 6년(AD 624)였고요.
그 후 평양으로 천도하려는 전략적 천도(도음지 옮김)의 필요성을 상기해 준 분이 고국원왕이었지요.
고국원왕(故國原王 AD 331-371) 때에 양자강 북부에 형성되는 전연(前燕) 모용황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길림성 집안현 북쪽 2.5 km 지점, 해발 676 m 산정의 환도성을 수리하여 이리로 옮겼는데(AD 342) 예상대로 겨울에 대대적인 침공을 받지요.
침입한 이유는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선비족 모용황(慕容황. 297-348. 재위 337-348)에게 반역한 부하 동수, 송황, 일두귀가 고구려로 도망왔고, 고국원왕이 모용황의 즉위에 반대했고(AD 336), 중원의 도모 중국통일에 고구려가 경쟁자였고, 후조가 전연을 침입할 때 고구려가 후조를 도왔던 까닭이고, 패배한 이유는 모용황에게 쫒겨 도망다니던 서형(庶兄) 모용한(慕容翰)이 단부(段部), 우문부 및 고구려로 쏟아다니면서 고구려 지형과 작전을 안 후에 모용황이 화해차 불러들여 서형의 전술을 채택한 결과 고구려 방어대책이 참패한 것은 물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朱씨)가 잡혀간 사건이 발생하지요.
전술의 기밀을 알아챈 모용황 군대가 산악지대 북도(北道)에서 패하나, 평야로 통하는 남도(南道)에서 소수의 병사를 이끌던 고국원왕을 격파하고 환도성을 함락한 후 부랴부랴 철수한 것.
그리고 모용각을 보내 고구려 남소성을 함락시킨 후 수비병을 두고가죠(AD 346).
어머니와 왕비가 볼모로 잡혀가자 고구려는 모용황이 하자는대로 수모를 당하다가 6년만에 고구려로 투항해온 앞에서 말한 모용황 휘하의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장군'을 돌려보내 주었는데도 어머니와 왕비를 돌려보내 주지 않았죠.
그리하여 질자(質子)와 조공을 바치고 고구려왕이 전연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수모를 감수하고 나서야 어머니를 모셔올 수 있섰답니다.
그래서 평안북도 평양으로 천도하고 북방영토를 꾸준히 넓힌 고구려 북진정책이었지요.
제 20대 장수왕의 장자 조다(助多) 고추대가(古鄒大加)가 방어ㆍ공격을 맡은 북방에는 몽골, 거란, 후연, 북조, 부여, 숙신, 남방으로 신라, 백제, 탐라, 야마토(대화.일본).
이 후 그 연나라가 형제간 싸움으로 망할 때까지 교류를 끊고 있다가, 광개토대왕이 그 땅 포함하여 싹 쓸어버린 다음 그 아들 장수왕이 평양으로 옮긴거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조다의 아들 문자(명)왕 시절에는 후연, 거란, 비려, 동부여, 숙신, 동예, 남으로는 신라, 백제, 가야 그리고 바다건너 왜국(일본)과 경계했지요. 여기서부터의 고구려 코드는 광개토대왕비(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 國岡上廣開土平安好太王) 묘비에 무지무지하게 많이 많이 돌에 새겨 기록했지요.
지금 이 본문에 필요한 것만 추스려 말씀드린다면;
장수왕 3년(AD 414) 9월에 세운 광개토대왕비를 고구려 기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통거우(通溝) 용산(龍山. 토구자산土口子山)에 비신(碑身) 5.34 m, 각 넓이 1.5m 비석 제 2면에 백잔국(백제)이 무릎을 꿇고 영원토록 노객(奴客. 신하)이 되겠다고 맹서했다.
그러나 영락 9년 기해년에 맹세를 어기고 왜(일본)과 화통하였다(2면 8행). 이 때 신라왕 역시 노객으로써 신민의 행세를 하는고로 왜적을 추적하여 임나가야 종발성 지역(여기 일본인의 우거한 곳을 일본인들이 '임나가야'를 자기들이 건국한 게라고 지랄?떨고 있지요. 그리고 불리한 비문은 쪼아버리고. 하여간 도국근성 중에 해적출신 개새끼들! 틀림없졔), 신라 염성 지역을 함락하여 왜구를 궤멸했다(10행). 신라 매금왕(寐錦王. 필자註 실성왕?).
4면 7~9행에 '묘지기는 지금 이후 서로 전매할 수 없으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더라도 살 수 없다. 법령을 어긴 경우에 판 자에게 형벌을 주고, 산 자는 묘지기를 하도록하라.-自今以後不待更相轉賣雖有富足之者亦不得壇買其~
그리고 13년 후 장수왕 15년(AD 427)에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고 한반도를 창고로 쓰기로 하고, 혹은 고구려가 웅신하는 소라게 껍질이나 스라소니 굴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전략를 세운 후 철저한 남하정책으로 승려 도림을 백제에 첩자로 파견하여 백제의 허실을 탐지하고 한편 백제의 국력과 인력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쓰죠.
AD 466년에 위(魏) 문명투후가 위왕의 후궁이 빌빌하다고 장수왕의 공주를 위나라에 시집보낼 것을 요구하나 결국 무효가 되죠.
AD 475년(문자왕 19세. AD 456년 丙申年生. AD 498년에 태자로 책봉됨) 2월에 도림의 계책으로 장수왕이 82세의 나이로 친히 3만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아차산(광나루 워커힐 뒷산)에서 목을 베죠.
AD 480 장수왕 68년에 말갈군사와 함께 신라 북부 공략에 나서 아산만에서 동쪽 죽령까지 정복했죠.
AD 493년 2월에 물길족(物吉族)에 의해 함락된 부여왕이 고구려에 투항하자 이로써 BC 4세기 때부터 800년 존속한 부여왕조가 멸망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