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끄기에 왜 그렇게 열성인가? 그 건 산불이 멍청해서다. 얘들이 주는 삼립빵을 비닐봉지채 삼키는 하마와 같다. 앞에 보이는 나무마다 죄다 삼킨다. 생각건대 사람들이 순진멍청하게 산에 땔감을 쌓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산림청을 탓하기 전에 관목을 30여년 크게 둬야 한다는 자연보호협회의 책임이 크다 할 것. 그러나 관목 30년이면 죽어 물기없어 불쏘시개. 그러므로 30년 수령안에 베어내야 한다. 막연히 자연경관을 내 버려둘 수는 없는 것. 그리고 산불이 지나간 곳에서 배워야 한다.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산야를 황망히 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기둥이 불타지 않은 나무를 그 지역에 심어야 됨을 알아야 한다.
9월 3일 현재 38% 진화됐으나 총피해가 14만 4,743 에이커. 이는 중간크기인 4분의 일 에이커 대지에 지은 집 58만채 건평을 불태운 면적. 숲을 사랑하고 숲에 들어가는 것이 숲을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인가. 산불에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는 것이 보험에 들어 있지 않아서인가? 국유림과 국립공원을 보험에 가입시켜야할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미국에는 키크고 힘세고 순발력의 상징인 나무꾼 폴 버냔(Paul Bunyan)이란 전설상의 정신적 지주가 있다. 그의 능력을 James MacGillivray가 글로 썼고 그 '폴 버냔' 이름 또한 Red River 제재소'로고'. 그가 머리칼 따주듯 나무 솎아주고 초원의 방화지대를 만들어 줄 것이다.
잎과 가지는 쏘시개가 될 뿐 서로 부딪혀 불나는 법이 없다. 바람에 나무기둥이 서로 부딪혀 우는 소리내는 나무를 솎아주면 자연발생적인 산불은 없다. 진(balsam)이 많이 나오는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크리스머스 추리, 노간주나무 그리고 우리가 벽난로에 피우는 자작나무 등 그 어느 한 그루 나무, 그 어느 한 사람이 성냥이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산림청장 '폴'은 방화조림을 하여야 하고 불의 이용으로 문명이 일어나서 세상을 불로 초토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방화범을 살인혐의로 이끌어 사형을 언도해야할 것이다. 대부분의 산불은 불씨를 보고도 그 자리를 떠난 미련한, 인간의 양심을 저버린 무책임함에 있는 것. 이들에게 과실치사상에 준하는 형사적 처벌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것이 무리수라고만은 할 수 없지 않은가.
온난건조한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1889년 샌디에고 오렌지 카운티 일대를 태운 큰 불을 대형화재(The Great Fire)라고 이름붙여진 이후 81년만에 산불이 일어 났다. 그런데 점점 빨리 23년만에 다시 나고 최근에는 10년 터울로 나던 것이 이 번에는 2년만에 다시 찾아 왔다. 인용한 권정희 논설위원의 "물과 불 그리고 정부는 자비란 걸 모른다"란 속담에 덧붙여 "이를 위한 복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다"라는 아인스타인의 말을 덧붙이고 싶다. 치산치수, 복구, 복지정책을 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불은 나무랄 것이 못되고 다시 올 불을 예방하는 데 힘쓰는 방법만이 좋을 것이다-往火者는 不諫이요 來火者는 可禦라. 생각하니 이승만박사 시절의 "꺼진 불도 다시 보자!"란 슬로건. 미국으로 수출할 때가 왔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