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악인 도척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살을 회쳐 먹고 포악방종하게 무리 수천을 모아 세상을 횡행하며, 물맛 좋은 도천(盜泉)을 파고 그는 끝내 제 수명을 마쳤으니 그는 무슨 덕을 따른 것인가? (하도 어려운 말이라 준하덕재遵何德哉?)
악인이 하늘로부터 보살펴진다면 하늘의 도라고 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그 누구나 아는 것은 날씨가 차거워진 후에도 소나무 잎새가 다른 나무보다 오래 버티다 다음해 봄에 남몰래 살짜기 그 죽은 잎을 떨군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독야청청, 사철 푸르게 보이는 소나무를 칭송한다.
독일에 "소나무여~~ 소나무여~~♪"란 민요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는 성삼문 시조가 있다.
이 성삼문은, 전에 백이ㆍ숙제 형제가 먼저 나라에 대한 의리상, 새로 건립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그 대신에 수양산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제 명에 살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 수양산 고사리 역시 새 나라 고사리가 아니드뇨"라고 비웃었지만 자신 역시 대세를 거역하고 의리라는 미명하에 지조를 지키다 한 낱 풀잎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으니, 겨울날 센 북풍을 만나면 남과 같이 한 잎 두 잎 떨구며 앙상한 가지로 남아있음이 시의를 맞추는 의로움이란 뜻입니까?
성삼문은 백이에게 먼저 왕조의 악함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렇다면 의리라는 도(道)는 인지상정상 믿음에서 나온다면 대세를 따르는 행위가 의입니까, 불의입니까?
전에 요임금이 양위하려던 허유가 받지 않고,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고 달아나 숨은 것이 도입니까?
전에 링컨대통령이 임명한 북군사령관 리(Lee)가 밤새 달려 자신의 고향이 달라붙은 곳이 포함된 남군총사령관으로 임명받은 행위는 의입니까 정도입니까?
아니면 청운의 뜻을 품은 공자님 꼬리에 붙어 이름을 날리는 안자가 의롭다는 겁니까? (*하도 어려운 말이라 부기미이행익현附驥尾而行益顯?)
그 안자가 훌륭한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는 권도가 사실상의 정도입니까 아니면 스승이 자신의 수제자의 일찍 죽음을 보고 눈물나게 서러워했다는데 그럼 먹을 것 없는 그를 왜 냅뒀습니까?
이 것이 스승으로써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인의예지의 실천이성입니까?
오호라 이런 세상에!
다른이의 삶을 흉내내어 살려는데 성현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겠도다.
그, 우리 삶의 도(道)는 사람이 느낀 도이지 하늘의 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악인이 왜 금방 거꾸러지지 않습니까라고 영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하나님은 악인에게 붙어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악인이 회개할 때까지 유예기간(grace period)을 너무 많이 주시는 게 아닙니까?
하-! 하나님, 아니 신은 죽었다며 쓰디 쓴 풍자(parody)로 읊은 니체의 말이 옳습니까?
그러시다면 우리가 하늘에서 진리를 얻은 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
그러나 하늘의 도고 인간의 도고간에 우리의 삶을 구경할 때 일찌기 가의(賈子)가 남긴 말이 있섰으니
"탐욕하면 재물 때문에 죽고, 열사는 이름 때문에 죽고, 권세를 부리고자 하는 사람은 권세 때문에 죽고, 평범한 우리같은 서민은 생활에 매달린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구만요. **
이 글은 사마천 및 그의 후학들이 엮은 글을 '史記의 뒤안길 德田의 문화일기'에 게제된 것에 불초가 제목을 붙이고 좀 다르게 느낀 점을 올린 내용입니다. 만일 덕전(德田) 선생이 안 계셨더라면 제가 이 글을 절대로 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깃만큼 지혜로워진다는 석가여래, 노자, 공자,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님 말씀을 믿습니다.
이 성현의 연대별 차례대로, 마지막 경전이라는 법구경 423장 마지막 구절에서, 도덕경이라 불리워지는 그 20장에서, 제자들이 편집했다는 중용 마지막 성론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산파술에서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마지막 말씀인 '아버님 저를 부탁합니다'라는 전능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