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왕은 영적 지혜로 자기나라 말로 모르는 것이 없섰다.그가 맡은 처음 재판에서도 아이의 생모를 밝혀냈음.
지난 60여년 간 일본은 독도를 대나무 잘라오던 남양군도 타케시마(take 竹, shima 島)로 오해하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도문서를 모르는 것이 없는 영어 문화권 언어로 번역해 놓으면 좋겠음.
그러나 독도에는 대나무가 큰 적이 없다.
나카이 요사브로는 독도는 석도石島[돌섬], 두 개의 바위섬, 갈대만 있지 나무가 없다고 기록했음.
다케시마(Takeshima 竹島죽도)이든 마추쉬마(Matsushima 松島송도)이든 동경 131도 51~52분, 북위 37도 14분에 위치한 '리앙코트 암석' 독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 '석도(石島)'는 고종임금 때 붙인 것.
그 전에는 삼봉도(三峰島), 가지도(可支島).
그리고 측정오차에 대하여 가시적 거리에 존재하는 지리적 정밀도는 서로 수송가능성(transferability), 거리마찰(distance decay)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 한 한 공간적 교류를 실현하게 할 수 있다는 메케니즘을 받아주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측정오차가 가시거리 범위, 수평선 이내의 거리라면 이해할 수 있다고 함. 그러나 리앙쿠르호가 측정한 독도의 다음의 경도로는 수평선 넘어의 먼 거리오차.
독도 경위선을 처음 측량한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Liancourt) 호가
독도의 위치를: 동경 129도 35분 21초, 북위 37도 14분.
정확한 쌍바위 위치는
독도 서도 위치: 동경 131도 51분 54.6초, 북위 37도 14분 30.6초
독도 동도 위치: 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 37도 14분 26.8초
지역구 시마네(島根)현(縣) 고시 제 40호(Shimane Perfectural Notice # 40, 1905. 2.21)에 주장한 오키시마(隱岐島 은기도)서북 85해리
다케시마의 위치:동경 131도 55분, 북위 37도 9분 30초
그러나 그 당시에 리앙쿠르호(號)에서 측정할 때 가시적 거리인 수평선 거리(4.5 km)보다 40배의 경도 측정오차 182 km를 냈는데 시마네 현(縣)에서 제출한 독도 위치 측정치는 정확한 지점 독도로부터 경도 7.5 m, 위도6 m의 오차를 의미하므로 독도에 위치에 대한 대한 이러한 정밀한 측정치는 후일에 삽입한 위조문서라는 증거. 당시의 측량술로 이렇게 정밀할 수 없기 때문.
까닭은 레이다 기술이 없서 미드웨이에서 대파당한 일본.
현재의 일본 레이다 기술과 천양지판.
미국과 달리 패망한 1945년까지 사람의 감각-청음기와 망원경으로 전술을 감행했던 것.
그러므로 위성촬영, 네이비게이터, 레이더 등 관측장비가 없던 1905년에 독도의 위치를 경도 7.5 m, 위도 6 m의 오차로 측량할 수 없음.
지도학 발달사에 비추어 볼 때에 시마네현 고시 3년 후인 1908년 일본 수로국 대감(大監) 아라바다 이와지로(荒畑岩次郞)가 朝鮮東岸竹島(隱岐島)[조선동안죽도(은기도)]에 대하여 1:18,204 축척(탈코드법)으로 동도를 여도(女島), 서도를 남도(男島)로 명명하고 작성한 지도가 일본 실측경위도원본에 수록되었지만 경도ㆍ위도에 대해서 불정밀.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San Francisco Peace Treaty, The Treaty of Peace with Japan)에 연합국에 제시한 일본 측 조선영토경계선은 두만강(豆滿江. 圖們江. Tumen River)으로 부터 하향하여 쓰시마(Thushima) 해협까지, 조선영토 동단은 동경 132도 40분, 북위 30도 30분까지. 즉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령.
Utsuryoto[울릉도]와 넉 점(點)의 도서가 조선 땅.
역시 일본 전함 니타카호 항해일지에 독도를 가리켜 '랑코 도島(Lian-court Rocks), 높이 40피트. 경사가 심하여 올라갈 수 없다로 기록.
메이지(明治) 3년(1870년) 簪本玉蘭(잠본옥란) 大日本四神全圖(대일본사신전도)에 Takeshima(타케시마, phantom Ullengdo), Matsushima (松島마추시마, '소나무섬, 소나무를 베어오던 real Ullengdo'), Liancourt Rocks[리안고르도暗礁암초]로 기록되었고,
메이지 정부 자문각료단(advisory body)이자 권력기관인 타이조칸(大政官)에서 우리나라와 분규가 있는 영토변경에 대하여 1877년에
'다케시마(竹島[울릉도]), 外(외) 一島(일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어보(御輔 [법령])를 내렸음.
한 번 메이지가 내린 법령은 1889년에 제정된 '대일본제국의 헌법'에 헌법과 같이 유효하다고 명시되었음.
명치천황(Meiji Tenno)은 즉위하던 해에 지난 제 56대 청화천황 정관 8년(866년. 신라 경문왕 때) 첫 관백인 양방기경으로부터 제 120대 인효천황 관백 가경(1867년)까지 1,000년간 지속되어 오던 천황의 자문관 칸바쿠(關白. the Chief Adviser to the Emperor. 무관정방정치)를 폐지하고 세력을 약화시킨 자문단을 설치하고 전권을 휘둘렀던 바 케임브리지 인명사전에 의하면 장군제(制)를 폐기하고 천황식탁(Imperial Diet)을 차리고 봉건제도를 철폐하고(1871년) 개혁 및 근대화계획 정치를 했기에 명치천황이 말하면 [호랑이] 법이었음.
그러므로 2009년 아스타로 총리가 국회에서 태정관 지령문에 대한 질의를 받자 '말할 수 없다'면서 답을 기피했음.
그는 자민당 총재겸 내각총리대신 아소타로(麻生太郞. 68세. 아소내각 2008.9.24~2009.9.16)
우리나라 어문에 '독을 깨다', '강진군 독다리 Dokdari' 石橋, '신안군 독산 Doksan 石山', 독도를 한자 표기로 '獨島', 돌, 높은 것을 '독', '둑, 뚝 纛, 독섬[纛, 뚝섬 纛島].
일본 해적상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선박제조용으로 소나무 벌채를 해가면서 그들이 마추시마(松島)라고 불렀음.
이에 1882년 고종임금은 이규원을 울릉도에 파견한 결과 거주자 32 %가 전라도 사람인 것을 확인.
전라도 13개 지역이 '石(석)'을 '독'으로 풀이. '독'을 '석'으로 표기.
1897년 유몽정(柳夢井)을 선봉대장으로 울릉도에 파견한 결과 일본인 70명이 난입해 들어와있음을 발견했고, 1883년에 김옥균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독견하게 하였다.
나무를 남벌하면 황무지로 변함.
그 예가 러시아와 프러시아의 공격 및 퇴각로였던 쿠로니안 석호(Curonian Lagoon). 평저선 선조용으로 무성한 소나무숲이 사라지고 황무지로 변한 가단스크(Gadansk). 벌채는 하루면 되지만 그 수림이 다시 이루어지려면 60년 내지 100년이 소요.
이에 1900년에 고종임금이 울릉도 수목을 보호하고 영토를 천명하기 위해 칙령 41호로 독도를 '石島(석도)'로 이름 붙이고 울도군[울릉도] 관할로 정했기에 주인이 없는, 무주물(無主物) 독도가 아니었음.
『조선삼림식물』 발간으로 카츠라 공작으로부터 기념수상(1927년)을 받은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동경大교수는 일본 강점기의 조선 식물 3,176종에 대한 『조선식물경개』에서
울릉고사리를 'Takeshima-shida다케시마-시다'
섬시호를 'Takeshima-shaiko다케시마-사이코'
울릉도 황백나무를 'Takeshima-kihanda다케시마-키한다', '竹島黃栢죽도황백. 鬱陵島特産(울릉도특산)'으로 분류함.
이로써 '다케시마(竹島)'는 독도가 아닌 '울릉도'.
일본이 조선침략, 만주침략, 그리고 노일전쟁에서 승리하던 해, 1905년 2월 22일에 일본의 일부사람이 일방적으로 독도를 Takeshima라는 이름으로 시마네(Shimane) 현 오키섬(Oki Island) 관할로 정했음.
따라서 당사국 조선과 시비없이 없이 일방적인 선포는 원인무효.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이승만대통령이 대마도는 한국땅'이라고 응수.
1952년 1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긴급명령 12호로 '포척심판령' 제정공포. 평화선 내에 들어온 일본어선 나포명령.
이 명령이 1965년 한일어업협정체결 때 역할 중지.
독도를 일본영령으로 표기할 것을 관철시킨 사람은 일본여인과 살던 일본정치고문관(주일고문관) 윌리엄 제이 시벨드(William J. Sebeld).
그가 독도를 일본령으로 명기해줄 것을 1949년 11월 14일자에 전문으로, 19일자에 서면으로, 1951년 7월 19일에 국무부에 요청.
우리나라에 기회가 왔섰다.
1951년 7월 19일 한국동란 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미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를 만난 양유찬 주미대사는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잘못 불리우는 것도 모른 체, '독도는 한국 땅'이라자 '어디 있는냐는 질문에 명백한 위치를 모른 체 '울릉도 동 쪽에 있다'고 대답하여 8월 10일에 딘 러스크는 '그 섬은 시마네현 오키섬 지청의 관할이라는데?'라는 내용을 한국정부에 보낸다.
예습을 하지 아니한 이 양유찬 박사의 일순간 무지함이 '독도가 한국 땅, 일본 땅으로 뒤집히기를 계속'하여 49개국 참여한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이 무려 18차에 끝남.
독도가 포격당하여 원 모습이 아님.
제 2차세계대전 종료 후 이 회의 기간에 발발한 한국내전.
연합국총사령부 명령(BCAPIN) 677호, 1033호에 독도는 한국부속령.
그럼에도 독도가 일본의 흉계로 폭격당한다.
1952년 5월 23일. 제 13회 중의원 외무위원회 야마모토(山本) 의원이 '독도 포격은 일본영토로 확인받기 쉬워서입니까;라고 묻자 외무성 이시하라(石原) 정무차관이 '대체적으로 그런 발상이다'라고 답변.
일본이 패망한 후 독도를 재일 미군의 폭격기지로 내정했기 때문.
1947. 9. 6. 연합국총사령부 명령 1778, 1951.7.6 명령 2160으로 이승만이 초대대통령으로 출마(당선 7.22)했던 1948. 6. 3에 독고포격으로 울릉도 어민 사상.
이에 6월 17일에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포격연습장임을 밝히고 향후에 포격을 일체 중지하겠다고 발표했지만 1951년 사령부 명령 2160 재지정하고 이승만이 재선(8.13)된 직후 1952년 9월 25일에 독도현지학술조사단의 접근을 막았다.
이 때에 이시하라 정무차관의 후안무치가 '독도를 포격장화 하는 것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확인받기 쉽기때문이다'라는 답변.
1953년 1월 20일에 주한미군사령부로부터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사용을 중지할 것을 예하 부대에게 지시한 보고가 있섰다.
이 말은 어업인 대도(大盜) 나카이 요사브로(中井養三郞)가 장물, 남의 물건 독도를 염탐하고 내무성 안우에(井上) 서기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산국장 마키 나오시마(牧朴眞) 및 수로부장 기모스키 가네유키(月千付兼行)에 의해 독도가 무소속이라 추리하고 외무성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는 훔칠 것의 가부를 결정하고 일본이 먼저 들어가 망루를 설치하고 해저전선을 설치하여 적함을 감시하는데 유리하게 할 목적으로 영토편입의 시급성을 역설하여, 비록 도리가 있는 내무성 안우에(井上)서기관이 반대했지만 독도 편입이 이루어지고 1905년 독도에 망루 설치. 10월 24일에 철거.
이로부터 4개월 후 5월 24일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이 러시아
로제스트 벤스키 발틱함대를 독도근처에서 최후 공격으로 승리하자 독도의 군사적 잇점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차츰 영해를 넓혀가는 경제적 발판으로 이용되어가고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