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끼리 학문논쟁을 통해 진리를 밝혀내는 것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은 없습니다. 다산의 글을 읽다 보면, 당대의 석학들과 직접 만나 학문을 토론했던 아름답고 의미 깊은 만남도 많았지만, 멀리 떨어져 살면서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학자들과는 편지를 통해 심도 깊은 학문 토론을 전개했던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참으로 부럽고 본받고 싶은 학자들의 사귐이었습니다.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귀향한 뒤의 학자들과의 토론은 다산의 학문이론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특히 의미가 컸습니다. 다산의 편지를 차분히 읽어보면 유독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1776〜1840)이라는 학자와의 학문토론이 따뜻한 온기까지 풍기면서 의미 깊게 생각됩니다. 김매순은 안동김씨 권세가 집안 출신의 학자인데 문장도 뛰어나고 학문도 깊어 대단한 성망을 지녔던 학자였습니다. 다산이 벼슬할 때 젊은 김매순과 잠깐 조정에서 함께 근무했던 인연이 끈을 이어주어 두 사람 관계는 몇십 년 뒤에야 복원되어 우정 어린 학문토론을 계속했습니다. 다산과 대산, 당파도 다르고 신분에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런 모든 장애요인을 벗어나 두 학자는 정말로 멋진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대산이 다산의 학문적 깊이와 높이에 매료되어 다산의 학문에 한없이 높은 평가를 내렸던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두 학자 사이에 ‘명철보신’이라는 글자 네 자에 대한 토론의 편지가 있습니다. 세속에서는 이롭느냐 해롭느냐를 밝히는 것이 명(明)이고, 불리한 경우엔 침묵할 줄 아는 것을 철(哲)이라 하고 몸을 온전하게 지키며 재난을 면하는 것을 보(保)라고 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다산과 대산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견해의 일치를 보고서 새로운 해석을 내려, 그 네 글자의 본래 의미가 어떤 뜻인가를 밝혀냈습니다. 다산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선악(善惡)을 분별함을 ‘명’이라 하고, 시비(是非)를 분별함을 ‘철’이라 하고, 어리고 약한 사람을 부지(扶持)함을 ‘보’라 한다.”라는 의미로 옛사람의 주석을 인용하여 다산이 해석해냈습니다. 김매순도 전적으로 찬성한 해석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더 부연했습니다. 대신(大臣)은 ‘명철보신’해야 한다고 했으니, 임금을 보필하는 고관대작은 사람을 천거하여 임금을 섬기게 해야 하기 때문에 선과 악을 밝게 구별하여 어진 선비들이 출사할 수 있게 해주고, 시비를 밝게 분별하여 뛰어난 사람을 발탁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진 선비와 뛰어난 사람들이 자신의 몸도 보존해야겠지만 그에 앞서 섬기는 임금이 더욱 보존되도록 하는 것이 ‘명철보신’의 의미라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하는 일이나 사람이 하는 일에서 어떤 것이 선악이고, 임금이나 신하들이 하는 일에서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를 분별하여 선하고 바르게만 되게 하는 고관대작의 일이 명철보신인데, 자신의 몸 보존만을 위해 선악도 시비도 가리지 않고, 이해관계만 따져 불리할 때는 침묵해버리는 것이 고관대작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자신의 보신을 위해 선악과 시비에 침묵을 지키는 오늘의 고관대작들, 그러니 인사의 난맥상은 끊일 날이 없네요. 인사정책에 조롱을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박석무 드림
--- Re: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참다운 의미
『명철보신(明哲保身)』뿌리와 추요(蒭蕘)의 그 뜻풀이 희극(戱劇). '명철보신'이란 말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이 다 일리가 있기에 아래의 말이 흥미있는 내용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음.
시경 4언시(四言詩) 주나라 선왕조(周宣王朝. BC 828-782)를 조명한 『증민(烝民. 만백성)』: 제 27-28구: 매우 지엄하신 임금의 분부를/ 증산보가 받자와 이를 행하니/ 제 29-30구: 여러 나라에 베프는 정사/ 중산보가 그 좋고 나쁨을 자세히 가리어서(仲山甫明之)/ 제 31-32구: 이미 현명하게 처신했으니(旣明且哲)/ 자신의 몸을 미쁘게 지켜나갔네(以保其身).
맹자가 이 구절들을 읽고 성선설을 주장하는 동기가 됬다고 전합니다.
이 서사시에서 장자(莊子)편에는 독립된 '明哲', '保身'을 떼어내어 다시 합쳐 고사숙어(故事熟語)를 만들었음.
31구에서 세상을 다스림(治人): '명철(明哲), 32구에서 자신을 지킬 줄을 아는 슬기로운 지기(知己): 보신(保身)을 따와 '시류에 말려들지 말고 매사에 법도를 지켜 온전하게 처신하라'는 의미에서 '명철보신'이란 사자성어를 만들면서 두 가지 비유를 듭니다.
하나는 <인간세(人間世> 편. 입지적으로 산모퉁이 토지 사당(廟) 옆에 자라는 거대한 나무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있는 나무 중에 어느 나무가 안전할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홍진세상에 남과 부딪는 것보다 은일(隱逸)이 좋다기에 이에 대해 주자청(朱子淸)의 <논기설(論氣說)>에서 지적한대로 허무주의 사상이 짙은 면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변무편(騈拇篇)에 '백이는 이름을 위하여 수양산에서 죽었고 도척(盜跖)은 이익을 위해 동능산(東陵山)에서 죽었다. 이 두 사람이 죽은 까닭은 다르지만 여기에 군자냐 소인이냐고 구별을 붙이는 것이나 스스로 듣고 보고, 스스로 얻고 남이 얻은 것만을 얻어 감히 인의(仁義)와 물질을 위하여 본성을 잃지 않으려 한다. 즉 명석한 사람[賢人]은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 자신과 연관된 일에 회피원칙을 가지라는 주장.
<시경> 설(說)에는 '이미 밝은 지혜와 사리에 통달하여 능히 자신을 보전하라'(旣明智又通達事理, 可以保全自身)고 말했고 <중용>에서는 '나아가고 물러서기를 자유롭게 하여(進退自如) 불패의 세상에서 자신을 세울 것(使自己立於不敗之地)'을 강조합니다(Be worldly wise and play safe). 명철보신명: '명철보신명(明哲保身命)'은 '명철보신'과 같은 의미.
그러나, 명철보: 다산이 멸사봉공을 강조하다가 신하된 자의 몸보신, 각자 정성명(正性命) 제 32구가 빠졌음니다.
시경을 포함한 경학에 정통한 다산이 몸보신 처세란 말을 뺀 이유는 그 당시의 정치적으로 말못할 사연이 있을 것 같음. 그 구절을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에게 '자신의 몸을 잘 보전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도저히 해석할 수 없섰겠음.
더 이상은 모르겠으나, 이해하기 힘든 까닭은 다산 정약용이 한문구조법을 가르치면서 '글자마다 따지며 연구하여 상형(象形), 회의(會意), 해성(諧聲)의 그렇게 된 까닭을 밝게 알아 문장을 다룰 때에 글자를 모아 쓰기를 마땅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섰기 때문에 그대로 따른다면
'명철보신' 한자의 구성과 운용에서
명(明): 회의. 日(=해)와 月(=달)이 다 보이니 밝다. 밝힐 명(顯), 총명(聰), 명석(賢). 이에 대해 다산은 '선과 악을 분별, 좋고 나쁨을 밝히는 것'이라고.
철(哲): 해성=형성(形聲). 折은 「절 →철」이란 음을 나타내고, 뜻은 조목조목 욱박지르다. 사리에 밝다(明), 지혜. 이에 다산은 '옳고(是) 그름(非)을 조목조목 판별하는 것'이라고.
보(保): 상형. 글자 모양이 '사람이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모양으로 보들 보(任), 길러줌(養). 이에 대해 다산은 '곁에서 몸을 부축해주는 것'이라고 해석.
그러나 '명철보신'에서 끝 글자 '신(身)'을 뺐다: 신(身): 해성[형성]. 임신하여 뱃속에 아이가 있는 모양과 음(音)을 나타내는 千(천→신=娠)이 어울린 글자.
다산은 여기에서 몸(躬), 신명(身命. 몸과 목숨)을 빼어내고 '어리고 약한 사람을 부지(扶持)함을 '보(保)'라고 한다'며 '명철보(明哲保)'로 해석하며 보신(保身)을 '부드럽다고 먹지 아니했고 홀아비 과부라고 업신여기지 않았다(柔亦不茹, 不寡侮矜)'는 40-42구에 나오는 중산보의 처세로 말을 맺은 것 같음.
여기에서 육서(六書)에 통달한 다산은 참담한 역사이야기를 재론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을 느끼게 하는 까닭은 우리나라가 모방한 중국제도에서 한나라 이전에는 주공(主公)이 죽으면 그를 따르던 신하를 산 채로 매장하는 관습.
시경 진풍(秦風)ㆍ황조(黃鳥. 가시나무 위의 꾀꼬리)에도 목공(穆公)이 죽자(BC 621) 순장되는 신하 엄식(奄息), 중항(仲行), 겸호(鍼虎)가 함께 오돌오돌 떠는 황당한 곡절이 서려있음을 다산이 절대로 모를 리가 없겠다 싶습니다.
역시 한무제 때에도 군령이 심하여 이기거나 죽거나 양자택일. 만약에 패전하고 돌아오면 사형. 예를 들어 당나라 선조가 되는 이광(李廣)은 흉노와 싸우다 포로가 됬다가 살아와 재출전을 다짐하고 사형을 면하지만 합동작전에서 패배하자 자결(BC 119)했고,
한무제에 의해 장병 100명을 거느리고 월지국에 파견된 실크로드 개척자, 외교관 장건이 흉노에게 13년간 포로생활 중에 도주귀국하여(BC 126) 패배의 댓가로 합동작전으로 흉노를 재공격하지만 패배당했을 때(BC 121)에 사형을 면한 까닭은 다행히 호(Ho, Chu Ping) 장군이 흉노를 감숙성 밖으로 내쫒아 승전가를 부를 때 이에 그의 죄상이 살짝 넘어갔었음.
그리고 이릉(李陵 BC 74)이 흉노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비록 탈출하여 귀국해도 잡혀죽을 줄을 알기에 아예 그 곳에살자 이에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지만 변호했다고 한무제가 사마천을 궁형(宮刑. 생식기腐刑)에 처했음.
결국은 이릉이 흉노수령 선우(單于Sanu)의 딸과 결혼, 친구 소무(蘇武)가 찾아가도 서로 오언시만 읊었지 돌아오지 않고 20년 생활 후 그 곳에서 죽음.
전투에서 지고 돌아와도 죽임을 받지 않으면 불x을 까는 훈서(薰胥)를 받음. 고대중국의 이런 상황에서 전략ㆍ전술이 우수하여 몸과 목숨이 온전할 때를 일컬어 보신명(保身命)했다고 합니다. 대아(大雅)ㆍ증민(烝民), 소아(小雅)ㆍ유월(六月)을 윤길보(尹吉甫) 작품이라고 가정하고, 문무를 겸한 두 사람 중산보(仲山甫), 윤길보가 물리친 흉노족을 험(玁), 노(猱)로 호칭하는 것을 보면 주나라 시절. 때는 재위 40여년의 임현편능(任賢便能)의 성군 선왕(宣王) 때. 법이 엄한 시절.
잠시 그 중산보의 뿌리를 살펴 보면 근 왕손. 주태왕(周太王) 고공단보(古公亶甫[父])의 셋째 아들 계력(季歷)의 아들을 주문왕이라고 하면 그 중산보는 주문왕 계부(季父) 우중(虞仲)의 아들 위간(委簡)의 13대 손으로 알려져 있고 고공단보의 차남 우중이 오(吳)나라 초대군주였던 형 태백(太伯)이 후사가 없자 형 집안에 들어간 오중옹(吳仲雍)의 후손.
그 중산보는 공전제(公田制)와 역역지조(力役地租)를 겸해 시행하는 등 선(宣)왕을 출중한 지혜로 보필하고 이민족흉노의 공격을 받은 급박한 상황에서 잘 무찔러서 자신의 목숨도 보존한 경사(卿士. 재상).
그가 승리하고 이름이 날리자 BC 827년에 왕명에 의해 좌천되어 산동반도 번(樊)에 봉해져 제(齊) 땅에 성을 쌓으려고 떠날 때에 윤길보가 전송하던 감회가 적힌 '明哲保身'(명철보신).
사실 윤길보와 중산보가 없어진 다음 왕 제 12대 유왕(幽王)ㆍ궁열(宮涅) 때 결국은 간신들만 남고 왕비가 포사(褒姒)라는 경국지색을 내쫓으려고 봉상(鳳翔)현 북방 견융(犬戎)을 불러 왕비가 왕을 죽이자 주나라(西周)가 망함.
이 시 '승민'을 당의 대문장가 유종원(柳宗元)이 읽고 '어진 사람이 암군(暗君)을 만나 36계 줄행랑한 기자(箕子)가 처신을 잘했다'고 그의 비(碑)에 '명철을 보전하다'라는 말을 새겼다고 합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기자는 은(殷)나라 제 30대 주왕(紂王. BC 845-813)의 숙부. 미자(微子), 비간(比干)과 아울러 왕에게 진실로 충간했으나 비간의 심장을 도려내자 기자는 죽지 않으려고 미친 척 광인이 되어 목숨만을 보전하여 조선 땅으로 도망갔다고 기록. 이 것이 주역 제 36괘 지화명이(地火明夷)-왼 발이 부려져 울고 있는 꿩, 태양이 땅 속에 빠져 들어간 상태.
예전 책과 독필(禿筆) <멸절의 평화>의 내용이 이와 같으나 잘 모르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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