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역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교과서를 비롯하여 많은 책들에 실린 이 사건의 경과를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그날 광주에 통학하던 조선인 여학생들이 나주역 개찰구를 빠져나오던 때에 후쿠다 등 일본인 남학생들이 박기옥이라는 조선인 여학생의 댕기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가 분기하여 후쿠다를 꾸짖었고, 후쿠다가 박준채에게 ‘조센진 주제에’라고 하자 박준채가 주먹을 날려 둘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술은 과연 얼마나 실상에 가까운 것일까. 위와 같은 ‘댕기머리 사건’의 줄거리는 사실은 <신동아> 1969년 9월호에 실린 박준채의 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1929년 당시에는 ‘댕기머리’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동아일보>1929년 12월 28일자 호외에는 일본인 남학생 3명이 박기옥이라는 여학생의 앞을 가로막고 희롱을 하여, 이를 본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들을 꾸짖었으며, 양측 간에 싸움이 시작되려는 순간, 역구내에 있던 순사가 이를 제지하고 박준채의 뺨을 때렸다고 보도하였다. 다른 신문의 보도에도 댕기 머리 이야기는 없었다. 또 당시 현장에 있었던 여학생 세 명 중의 한 명인 이광춘은 1999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기옥은 당시 휴학 중이어서 당일 통학열차를 타지 않았으며, 조선인 여학생 3명이 개찰구를 빠져나오려 할 때 일본인 남학생들이 한 학생을 밀쳐서 그 학생이 여학생들과 부딪쳤다. 당시 박준채는 우리보다 앞서 개찰구를 빠져나가다가 우리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돌아보고 쫓아와 일본인 남학생 후쿠다와 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인 남학생 다나카는 일본인 학교였던 광주중학교 동창회지에 훗날 기고한 글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나주역을 빠져나올 때 조선인 남학생들이 후쿠다를 불러 ‘왜 조선인 여학생의 앞을 가로질러 개찰구를 빠져나왔느냐’고 꾸짖었다. 이에 후쿠다는 ‘여럿이 함께 몰려나오다 보니 때로는 앞으로 가고 때로는 뒤로도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대답하였다”고 썼다. 또 당시 나주경찰서 순사였던 일본인 우치다는 훗날 <광주학생사건 노트>라는 책에 기고한 글에서, “박기옥이 정기권을 역원에게 보여주고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순간, 2~3명의 학생이 한 명의 학생을 뒤에서 밀쳐 그에게 부딪쳤던 것이며, 그녀는 비틀비틀하며 넘어질 뻔하였을 뿐이다. 이로 인해 모여 있던 학생들의 말다툼이 있었지만, 역원의 제지로 별일 없이 끝나고 삼삼오오 해산하였다”고 썼다. 이처럼 당시 사건에 대한 증언자들의 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서로 다른 여러 이야기 가운데 두 가지 쟁점을 뽑아 정리해보자. 첫째,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은 현장에 있었는가. 둘째, 일본인 남학생들은 조선인 여학생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겼는가, 아니면 뒤에서 부딪쳤는가, 그것도 아니면 앞에서 길을 가로막았는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보도와 증언
박기옥의 광주여자중학교 학적부를 보면, 1929년에 중도 퇴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날짜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언제 중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당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기사에는 모두 박기옥이라는 여학생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또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정무총감에 보고한 기록에서도 현장에 박기옥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박기옥이 당일 현장에 없었다는 이광춘의 기억에는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남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들을 어떻게 괴롭혔는지에 대해 다나카는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을 가로막았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인 순사와 이광춘은 일본인 학생들이 뒤에서 부딪쳤다고 했다. 그리고 박준채는 댕기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박준채는 여학생들의 앞에 있었기 때문에 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본인 남학생들이 후쿠다를 밀쳐서 후쿠다가 조선인 여학생에 부딪혔다는 이광춘과 우치다의 증언이 사실에 더 가깝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처럼 불과 5~10분 사이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주역 사건이라는 작은 사건의 경우에도 그 사실을 재구성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요즈음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보도하는 신문, 방송의 기사는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그 안에도 잘못된 정보, 부정확한 증언 의도된 왜곡과 은폐, 과장과 축소 등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권위주의적인 사회, 부정과 부패가 심한 사회, 언론의 자유가 위축된 사회일수록 그 가능성은 더욱 클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일이든 현재의 일이든 이에 대한 보도, 기록, 증언, 회고 등을 너무 쉽게 믿어서는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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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1929년 나주역 사건의 재구성 - 국사의 재구성 저명한 역사가 산타야나(Santayana)는 '역사는 언제나 틀리게 쓰여져 언제나 재구성해야된다'고.
마치 사물의 이치를 따지지지 않고 세밀히 글을 읽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고, (마음은) 공평하게, (일이란) 고집으로 되는 게 아니고 (사건을 대하는 것을)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서 대하지말라는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말씀처럼
역사 인식에 있어서도 민간에 전하는 그 세밀한 잡사(雜史) 자료보다는 심취하지 않은 별사(別史) 급수 이상(以上)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좋겠다 싶습니다.
본문에 인용하는 나주역 사건(1939.10.30)을 계기로 다음 해 5월까지 대구항일만세운동으로 이어간 일련의 '광주학생 항일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겠지만 그 동기가 된 나주역 충돌사건 진술ㆍ기술ㆍ회고를 일일히 시비를 따지는 것은 그 당시에 견해가 서로 다른 10여종 잡사에 지나치게 세밀한 관찰일 겁니다.
그 당시 '민중의 지팡이' 동아일보 호외, 민초의 울분, 통치국 총독부에 보도, 보고된 의견이 분분할 때에는 모조리 털어버리고 초연한 처지라야 될 것입니다.
사건 경위의 육하(六何)ㆍ방법(How) 에서 인과율로 나타나는 효과, 인과율에 원칙적으로 역사적 무게가 실릴 겁니다.
그러므로 위에 실린 본문은 세계사(史)적 접근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일반적인 예화라고 여기면 식민지통치국 일본의 그 지난 20년간(예를 들어 광주-송정리간 일본학생 전용열차칸) 이민족 격리정책(segregation), 우민화(愚民化)정책에 일본이 만족해 했지만 항일민중운동으로 넘어갔기에 식민정책이 실패헸다는 증거를 확인하는 데 의미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위 본문에서 지적한 <따라서 과거이든 현재든 보도, 기록, 증언, 회고등을 너무 쉽게 믿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의견에 동감하면서 1/2.
[속 2/2 뉴스보도와 정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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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보도의 정면사적 가치
우리의 그 동아일보는 민중의 소리, 강점기에서 피어린 역사. 1929-1930년에 신문차압 31회, 기사삭제 56회, 4차례 발행정지, 1936년부터 다음 해 6월까지 정간, 1940년 강제폐간.
손기정이 고기도 못 먹고 보리밥에 김치 먹고 달음박질에서 일등을 하자 도꾜(동경)대학에서 김치 속에 흥분제거 들어있는 것은 아니냐고 의심을 품고 연구했으나 김치 속에 그런 성분이 없다는 미 확인 보도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누가? 손기정 선수가 언제? 일본에 강점당한 시절 1936년에 무엇을? 올림픽 마라톤을 어느 쪽으로? 일본인으로 어떻게? 선수로서 온갖 힘을 다해 승리했다고 취재보도한 데 대해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자 마라톤에 우승한 손기정이 '왜 일본사람이냐'며 그의 런닝 셔츠 욱일기 태양마크를 화가 이상범, 이길용기자가 태극마크로 바꿔놓은 신문이 출간되자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사임시킴), 주필 김준연(사임), 편집국장 설의식(사임), 사회부장 현진건(사임) 등 11명이 총독부에 의해 체포당합니다.
그 이길용을 포함하여 최승만, 신낙균, 서영호등은 다시는 언론에 종사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석방 후에 사임.
그 기사에는 울분의 민중, 애민애족의 정의감이 거의 들어가 손 선수가 비록 우리나라사람이지만 한국대표로 출전한 것 처럼 내보낸 기사는 세계史에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물론 독립정신을 고취한 그 동아일보가 수난에 접어든 것은 단지 손기정 선수에 대한 안타까운 보도만은 아니었지만 애국애족,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논설이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지적 총력인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왜, 어째서', '사실은 그래서', '그래야', '그런 까닭으로', '~때문에'라는 윤리적 이유(Why)가 붙어있지 않는 한 취재된 보도일 뿐 '과거의 일이든 현재의 보도이든 기록, 증언, 회고등'은 일상적인 역사에 섬광(閃光)하는 접점이기에 이 점에서 민중을 지향하기 위해 가치가 있는 향도적(嚮導的) 방향량(方向量 vector) 논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까닭은 뉴스로 확인한 지(知)는 풍속(風俗), 시령(時令), 잡사(雜史)이기에, 그 많은 사초(史抄) 중에 골라 최대한으로 빨리 해석한 논사(論師)가 지혜자이기에 정면사에 가까운 필봉으로 민초를 향도해온 신문을 '민중의 지팡이, 선구자'라 부르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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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처럼 엎어졌다가 붕어빵처럼 뒤집힌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우리 정부가 수립되고 한국돌란에 휴전이 되던 1953년에 나주역사건으로 계기가 된 그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
이승만(1958), 윤보선(1960), 박정희(1964) 대통령이 이 기념행사에 참석하다가 제 8대 박정희 대통령 1973년 시절에 폐지한다.
1999년에 들어서자 김대중 대통령이 자리를 마련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6년에 들어와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등의 제안(9월 5일)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11월 13일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다시 제정.
광주학생사건을 의거라고 부를지 혁명이라고 불리워지기 전에 이 역사적 사건은 하나인데 정권을 잡으면 그 의미를 거북이처럼 엎어버렸다가 붕어빵 처럼 다시 뒤집힐 수가 있는 역사인지 매우 흥미롭고 고이하지 않습니까?
광주학생사건이 지역감정을 담은 술입니까? 그들의 희생으로 정권을 창출합니까 아니면 그 이념이 걸리적거립니까? 그 정권 금잔에 든 술이 금잔을 위한 겁니까, 술을 위한 금잔입니까? 그 피를 담은 탁배기가 권위를 담으라는 그릇입니까? 선거로 추대(推戴)되는 몰이표 송사리가 담긴 어항입니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올바른 기사가 나가지 않겠습니까? 다산의 정치론에서 정치권력의 발생과 근거에서 민초를 이용하는 자는 방벌(放伐)당한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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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는 학생의 날이 놀아나는 대통령령(令)
이승만정권 1953년 10월 22일에 제정 박정희정권 1973년 2월 23일에 각종기념일 규정 때 폐기시키는 대신 성년의 날 제정(4월 20일), 1975년에 5월 6일로, 전두환정권 성년의 날을 1985년에 5월 셋째 월요일로 재지정.
전두환정권 1980년 5월 18일 광주의거 분쇄* 전두환정권 1982년 5월 15일에 학생일 폐기 전두환정권 1984년 9월 22일 학생독립운동 법정기념일로 재제정 김영삼정권 1997년 4월 17일 광주의거를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제정* 김대중정권 1998년 7월 25일 기념식 및 행사 삭제, 정부기관의 기타행사 금지령(대통령령16718, 17006, 17628호) 김대중정권 1999년에 학생독립운동행사에 참석 노무현정권 2006년 9월 5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의 날 재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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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강대국이 될지언정 대국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폴랜드에 350만명, 수도 바르샤바에 유대인 50만명이 살고 있섰는데 사소한 시비가 항변으로 커져 서권총, 소총, 몰로토프 칵테일로 무장하고 나치에 반란을 일으킴.
이에 나치사령관 한스 프랭크(Hans Frank)가 "내가 유태인에게 원하는 게 없다. 제발 꺼져버려라. ..어디서든지 보이는대로,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없애버리겠다!"(1941.12.16)
그리고 얼마 안 있서 21명의 나치 리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이 망하기 일주일 전에 자살합니다(1945.4.30)
그 후 콘라드 아데나워 서독수상이 이스라엘에게 보상하려고 시오니스트 지도자 나훔 골드만(Nahum Goldmann)을 만나자 "한 푼도 깍지말고 1조달러($1,000,000,000,000) 이상을 달라. 흠잡아 값을 깍거나 짖궂은 말씨름이나 하려면 협상을 할려고 말라"고 요구하자 즉각 승락합니다.
우리나라를 대하는 일본인 태도는 갭니다. 아니 사람탈을 쓴 원숭이입니다. 중국, 남ㆍ북한에 보상하면 망할 나라. 맥아더 덕분에 빠져나갔고, 한국동란 때문에 잊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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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광주, .. 김구, 나석주, 안중근, 이봉창, 수 많은 독립운동가 및 부역, 정신대가 있섰는데 왜 제대로 된 작품 하나가 영어로 번역된게 없는가?
어떻게 해서 정신대로 끌려가 일기장을 남기고 죽은 여인은 없는가?
남과 꼭 비교할 건 아니지만, 그러나 유대인 앤 프랭크는 열 댓살에 글을 남긴다.
Anne Frank (1929-1945): 여덟 사람이 나치 밑에서 숨어 살며 고생하다 숨어사는 게 밀고 되어 앤이 15살 때에 쫓겨나 다음해에 베르겐 벨슨에서 죽는다.Otto Frank: 앤의 아버지. 앤이 죽고 나서 일기장을 발견한다.
Meyer Levin: 앤 프랭크 일기를 영어로 직역한 유대계 미국 소설가
Lillian Hellman: 유명한 극작가, 親스타리니스트. 레빈 번역은 극본에 맞지 않는다고 프랭크에게 말한 후 앤이 남긴 일기내용을 보다 극렬하게, 보다 감명깊게 고친다. 이 것이 앤 프랭크의 수정판으로 결정되고 이 것으로써 나치의 안티세메티즘이 끝나게 된 동기가 되고, 홀로코스트 사건이 실제로 있섰음을 세계적으로 믿기 시작하게 됬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치하의 우리 선조는 상처도 없고 뭡니까? 악몽도 좋은 추억도 없단 말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