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생각하면 선비[儒]란 벼슬과는 거리가 먼 음전하고 예의바른 신사(紳士) 정도로 여기기 십상입니다. 그렇지만 조선 5백년은 ‘선비의 나라’였으니, ‘선비정신’이 세상을 이끄는 기본적인 이념이 되었다고 할 때의 ‘선비’란 참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산은 『주례』 천관(天官)편에 나오는 “도덕(道德)으로 민심(民心)을 얻는 사람을 선비라 한다”를 인용하면서, “선비라는 명칭이 그렇게 크도다(儒之名不其大歟)!”라고 감탄하였습니다.(「問儒」)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많은 나라였습니다. 비록 선비라는 단어에는 문약(文弱)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어 완전히 긍정적인 뜻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가장 긍정적인 하나의 개념을 찾아낸다면 ‘선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산은 ‘진유(眞儒)’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속유(俗儒)’나 ‘부유(腐儒)’ 등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참선비’를 희구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의미로의 ‘선비’ 개념에 정치·경제·국방·문학 등 온갖 분야에 능력을 갖추어 나라를 경륜하고 백성들을 건져낼 수 있는 인재를 다산은 ‘참선비’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俗儒論」)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선비론은 어떻게 펼 수 있을까요. 도덕으로 민심을 얻는 참선비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썩은 선비인 부유, 비루한 선비인 ‘비유(鄙儒)’, 천박한 선비인 ‘천유(賤儒)’, 도적질 잘하는 ‘도유(盜儒)’, 공소한 논리나 펴는 ‘공유(空儒)’ 등이 판치는 세상이 오늘입니다. 다산은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에도 참선비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개탄할 때가 많았습니다. 요즘처럼 신자유주의 논리로 세상이 얽매어 있는데, 선비라는 이름으로 되어지는 일이 있을까요. 예의(禮義)를 차리고 염치(廉恥)를 아는 선비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세상인데, 선비나 참선비가 존재할 틈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못된 일을 하면 할수록 높은 자리에 오르고, 못된 일을 많이 할수록 더 많은 돈을 버는 세상에서 선비타령을 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그렇지만 다산의 글을 읽어보면 선비다운 선비, 참선비가 나오지 않고는 올바른 세상도 좋은 나라도 될 수 없노라고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유배살이 초기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내가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오직 둘째가 열심히 독서하는 일뿐이다. 둘째가 능히 선비의 마음씨를 갖게 된다면야 내가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느냐?”(「寄二兒」)라고 자신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유자심두(儒者心肚)’, 즉 선비의 마음씨를 갖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계속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명문 학교를 다니며 공부도 잘해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 마음속에 선비정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오늘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해괴망측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고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턱도 없는 변명만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선비의 마음씨에 대해 말해주고 싶습니다. 고관대작들이 선비의 마음씨를 회복하지 않고서야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박석무 드림
--- Re: 선비의 마음씨를 회복합시다
자고로 손숙오(孫叔敖) 같은 분이라면 몰라도 사표가 될 선비의 마음씨를 가진 분이 드물겠죠.
손숙오: 내가 존경받는 것이 관직이 재상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 자신에게 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관직때문이라면 나 자신때문이 아닐 것이고 나 자신 때문이라면 그 관직때문이 아닐 것이다.
내가 만족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볼 여유가 있는데 어찌 사람들이 귀하고 천하게 여기는 것에 마음을 쓸 겨를이 있겠는가.-劉向 쌍두사 음덕양보, 장자 외편 전자방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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