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이 변이(變易)했으므로 일단은 신흥 청나라와 화친하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하여대의명분을 찾아 힘 없는 친명(親明)보다는 존국(存國)이 우선이 아니겠읍니까?
인조임금에게: 척화는 옳은 일이나 싸울 힘이 없고 화친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라를 구할 일이옵니다. 대간들이 신을 공격하는 것은 감내할 수 있사오나 종묘사직, 나라가 쓰러져도 서로 쳐다볼 뿐 별다른 방책도 없이 싸우기만을 고집하는 것은 심히 우려됩니다. 화친을 해서라도 전쟁만은 막아야 합니다.
결국 인조 임금은 잡혀가지 않았지만 청태종을 죽이려는 화약이 폭파되어 중상(이로 인해 사망)을 입자 최명길이 僧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밀파했다는 혐의, 또 행수들이 명나라의 세작[스파이]이 되어 작전이 누설되었다는 혐의로 선양(瀋陽)에 잡혀가 구금되어 이미 잡혀온 김상헌을 만나 주고 받은 시.
최명길(1586. 선조 19년~1647. 인조 25년)
탕빙구시수(湯氷俱是水) 끓는 물과 얼음은 모두 물이요, ...
어묵각천기(語默各天機) 말하거나 말하지 아니하거나 각기 천기가 있는 법
이에
경상(經常) 대의(大義) 불이(不易) 척화파(斥和派) 김상헌(예조판서) (1570. 선조 3년~1652. 효종 3년)이 응답하기를
권혹현독어(權或現獨語) 권도란 혹시 지금 혼잣말이 아닌가. ...
조차신형권(造次愼衡權) 아무리 급하더라도 권도를 저울질하기를 삼가할지로다.
이로써 비록 길은 다르지만 애국하는 마음은 같기에 서로 화해했지만 효종 북벌 때에 김상헌을 '대노(大老)'라고 추겨세운 후로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영조ㆍ정조 때에 나라가 부흥되려다가 결국 고종 때에 일본에게 망하게 됬답니다.
그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은 수모에 대해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懲毖錄)을 남겼습니다만 인조 25년(1647)에 간행되어 널리 읽혀지게 됬다고 하지만 징비란 뜻을 제대로 안 사람은 유성룡 자신이었습니다.
그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대목에서 "하늘은 어쩌라고 순신에게 그 뛰어난 재주와 능력, 그리고 인격을 주었으면서 생명은 더 주지 않았던가. 아 아! 아깝고 안타깝다!"
그 후 징비의 뜻을 제대로 알아 귀양가서도 죽어라고 글을 남기며 후세를 위해 징비한 분이 다산이었습니다.
징비란 시경에서 읽으셨듯이 '소비(小毖. 내 앞서 큰 아픔을)'에 '내 앞서 큰 아픔을 겪어봤거니 뒤에 올 환난을 지례 삼가리(여기징이비후환豫其懲而毖後患)', 주희 해석으로 '전과(前過)를 뉘우쳐 삼가 하는 것(소이사인경구징비所以使人驚懼懲毖)'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