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게시판 > 

총 게시물 404건, 최근 0 건
   
모란동백 이제하
글쓴이 : ljh 날짜 : 2012-10-21 (일) 13:43 조회 : 4718

모란동백

           

제목: 김영랑 조두남 모란동백 [작사/ 작곡 / 노래 이제하 (조영남 리메이크)]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산의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해도

또 한번 모란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녁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불고 덧 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래뻘에 외로히 외로히 잠든다 해도

또 한번 동백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한번 모란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모란동백으로 널리 알려진 이 음악은

소설가 이제하의 발표곡이라는 것을 아는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음악 모란동백을  이제하 작사 작곡 노래까지 불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것이다....

가수 조영남씨가 가끔 부른다는 사실이외에는....

 

李祭夏씨는 1998년에 "빈 들판"이라는 CD를 발표했다.

총 10곡이 들어 있는데, 지금 이곡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을 발표하였으며

그 후 이 노래는 조영남씨가 리메이크하여 더 널리 알려졌다.

이제 이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끝날무렵이면 동백이 만개하겠지요

 

환갑에 가수 데뷔
  李祭夏씨는 1998년에 「빈 들판」이라는 CD를 발표했다. 총 10곡이 들어 있는데,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라는 노래는 조영남씨가 리메이크하여 자신의 CD에 수록하였다. 1998년이면 그가 환갑을 맞은 해이다.

▲ 1961년, 24세 때 李祭夏씨의 모습.   

 

<소설가 시인의 약력>

 ·1937년 밀양 출생

 ·조각가면서 소설가/시인/가수 등으로 활동

 ·1956년 <새벗> '수정구슬'로 등단

 ·1985년 이상문학상, 1999년 편운문학상 수상

 ·소설문예 창간 편집위원(1977)

 ·명지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1999)

 

 

 

 

▲ 이제하 -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화가인, 이른바 '전방위 예술가' 이제하의 원제"김영랑 조두남 모란,동백"

 

 ―환갑의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시다니 굉장한 일 아닌가요.  
  『애들 장난에 말려든 거야. 1980년대 중반부터 코드 열댓 개 익혀서 놀러가면 기타 치고 노래하곤 했어요.

내가 자주 가는 카페 「나무요일」에 오는 사람들이 내 환갑에 CD를 선물하자며 돈을 모았나 봐요. 
  
  이미 만들어 놓은 몇 곡에다 부랴부랴 몇 개 더 만들어서 녹음한 거죠. 「나무요일」 주인의 친구인 「동물원」 멤버 유준열씨 녹음 스튜디오에서 댓바람에 만든 거죠. CD가 나온 뒤 100명 정도 모인 자리에서 콘서트도 했어요』

 

 

▲ 이제하 작사·작곡·노래 "김영랑 조두남 모란동백" 사투리가 섞인 음성으로 노래를 듣노라니 이제하님이 너무 멋지시다.

1985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상문학상 수상하신 분. 바로 그해에 이상문학상 수상집 단행본을 사면서 이분을 알게되었다  


이제하(李祭夏· 소설가)

1937년 4월 20일 (경상남도 밀양)

1937년 경남 밀양 출생, 홍익大 조각과·서양화과 수학. 1958년 "현대문학"에 詩 데뷔, "신태양"에 소설 당선. 196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입선. 소설집 "草食· 기차", "기선, 바다, 하늘"· "龍", 소설선집 "유자약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장편소설 "열망"·"소녀유자"· "진눈깨비 결혼", 시집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빈 들판". 그 외 다수의 산문집·콩트집·화집·영화칼럼집 발간.

세 차례 회화전. 1999년 3월 명지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이상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 편운 문학상 수상.   

 

 

 

▲ 1985년 11월 구입한 이상문학상 수상집 단행본과 위의 책들은 지금은 거의 품절된 책이다. ⓒ 2009 한국의산천

 

1985년 제9회 이상 문학상

본상 수상작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제하

추천 우수작 : 천둥소리-김주영-외 7편 

 

다 저물어 가는 겨울 저녁 눈(雪)이 그리우면, 혜화동의 카페 마리안느에 가 보라. 소설가 이제하가 대표인 그 카페에는 독(毒)이라는 뜻을 지닌 프아종 향수처럼, 펄펄 내리는 눈 향기가 나는 그녀가 앉아 있을지 모른다.

사람이기를 멈춘 채 쉬는 막 향기가 나는, ‘눈앞이 캄캄하고 못생긴 내 청춘’이라 읊조리는 고양이처럼 근사한 여인이 기다릴지 모른다.

<박형준·시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제하 / 문학동네
르네상스적 예술가의 行旅. "글쓰기는 곧 가난의 의지"  [글 한국일보 하종오 기자]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아/ 혹은 하얀 햇빛 깔린/ 어느 도서관 뒤뜰이라고 해도 좋아/…/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여/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이제하(71)가 1950년대 중반 고교생 때 쓴 시, 학원문학상 수상작으로 당시 한국의 문학소년ㆍ소녀들을 온통 들뜨게 했다는 이 시 ‘청솔 그늘에 앉아’가 생각난 것은 봄날 때문인지 모르겠다.

1998년이니까 꼭 10년 전이다. 그가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리사이틀을 한다는 제보(?)를 받고 달려갔다. ‘청솔 그늘에 앉아’ 등 자작시에 직접 곡을 붙인 노래 10여곡과 ‘세노야’를 통기타 치며 매력 넘치는 허스키로 부르는, 이미 이순 나이 지난 그의 모습에는, 타고 난 아니 신들린 예술가라는 표현 외에 더 적절한 것이 없었지 싶다.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화가이자 가객, 여전한 현역인 그의 이름 앞에 붙는 르네상스적 예술가라는 수식은 이제하 이외의 다른 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작품 제목처럼 그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 나그네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이미 3년 전에 죽은 아내의 유골을 뿌리려 동해안으로 가는 한 남자의 여정이다. 그 행려에 분단 문제와 샤머니즘, 현실과 환상, 필연과 우연이 얽혀들면서 이제하의 소설은 시처럼 그림처럼 펼쳐진다.

 

‘환상적 리얼리즘’ ‘광기의 미학’으로 불리는 그만의 글쓰기다. 그를 만나보면 그 환상, 광기는 결코 포즈가 아니다. “충만하면서도 근원적으로는 공허한 바다처럼, 나에게 문학이란 차라리 어깨에 힘주어야 하는 그 모든 거창한 것들을 완전히 제외시켜 버리고 난 뒤에야 만날 수 있는 어떤 실체이다.

한 올의 거짓도 틈입 못할 정도로 나와 세상 사이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졌을 때에야 그 핀트도 바로 잡힌다… 이 나라에서 문학을 한다는 소리는 그래서 결국은 가난의 의지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출처 : 인터넷한국일보]  

 

영원한 아웃사이더   
카페로 생계 잇는 이상문학상 수상자  

 

서울 동숭동 대학로 골목에 자리한 카페 「마리안느」. 30여 평 남짓한 좁은 실내 한쪽 작은 무대에 전자 피아노, 드럼, 기타 등의 악기가 있다. 그 옆으로 서적과 도예품, 부채 등을 파는 판매대가 설치되어 있다.

귀에 익숙지 않은 제3세계 음악이 흐른다.

 

이 정체불명인 카페의 주인은 올해 70세인 소설가 李祭夏(이제하)씨.

캐주얼한 의상에 벙거지를 쓴 李祭夏씨가 카운터에 놓인 컴퓨터로 자신의 홈페이지(www.zeha.pe.kr)를 점검하고 있다. 그의 홈페이지는 자신의 작품과 함께 제3세계 음악, 희귀 영화가 수록되어 있어 네티즌들에게 인기가 높다.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바짝 마른 몸피의 작가에게서 여전히 청년의 냄새가 났다.

 

李祭夏씨는 『평창동에서 카페를 운영하다가 집주인이 느닷없이 가게를 비워 달라는 바람에 지난 3월에 대학로로 옮겨 왔다』고 했다.


―이상문학상 수상자인 노년의 소설가가 카페를 운영하는 걸 보니 이색적이면서 낭만적으로 생각됩니다.

" 낭만은 무슨, 다 먹고살기 위해 하는 거지. 도배해 달라면 도배해 주고, 구들장 놔 달라면 구들장 놔 주면서 먹고살기 위해 이것저것 하는 거죠" 그는 서울 신촌에서 1973년부터 3년간 「까치다방」을 운영했다. 첫 창작집을 냈지만, 수입이 없어 생활의 방편으로 했던 일이다.

 李祭夏씨는 지금까지 단편집과 장편을 합쳐 모두 7권의 소설집을 냈다. 뿐만 아니라 시집 2권, 동화책 2권, 소묘집 1권, 영화칼럼집 2권, 가요 CD 한 장을 발표했다. 그림 전시회를 세 차례 열었다. 소설가·詩人·동화작가·영화칼럼니스트·화가·가수 등 광범위한 활동영역 때문에 그에게는 「전방위 예술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998년에 낸 CD에 담긴 12곡 중 9곡을 직접 만들었으니, 작곡가·작사가도 「전방위」에 포함시켜야 한다.

 

소설이 本業  

 

 

◀ 李祭夏씨는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누비며 새로운 일을 도모한다.

 

―많은 일을 하셨는데,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은가요.  
  『소설가지 뭐, 소설로 공인받았으니. 詩나 동화는 그런 게 있다는 정도죠. 시단에서 나를 본격적인 詩人 대열에 끼워 주지 않아요. 그저 이 사람이 詩도 썼다, 시집도 있다, 그런 정도죠. 소설 작품이 가장 많으니 그게 본업이죠』 
  
  ―한 사람이 많은 재능을 갖기 힘든 일인데, 무슨 비법이 있나요.  
  『재주 많아서가 아니라 먹고살려고 한 일이지. 나는 재주라는 걸 믿지 않아요.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있을 수 없어요. 그리고 싶어 흔적 남기는 게 그림이죠. 완성된 작품 틀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 나이에 깨달았어요. 
  
  소설도 「쓰고 싶어 썼나, 거기에 전부 투여했나」가 중요합니다. 소설의 구조는 간단하고 거의 똑같아요. 「얼마나 진심을 갖고 표현하고 전력을 다했나, 고통한 흔적이 있느냐」가 중요하죠.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넣거나 원하지 않는 키스신을 넣거나 하는 건 금방 보여요. 좋은 소설이 아니죠. 얼마나 부벼 댔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를 하는 사람은 한 가지를 잘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李祭夏씨는 이상 문학상·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한 정상의 소설가다. 1999년에는 시집 「빈 들판」으로 편운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분야에서 「끼」를 발산했다. 1937년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할 즈음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객지를 떠도느라 3~4년 만에 한 번씩 집에 들렀다. 2代 독자로 두 누나의 사랑을 받으며 응석받이로 자란 그는 「낯선 사람」인 아버지가 늘 무서웠다고 한다. 
  
  『다들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조금씩 갖고 있죠. 네 살 때 일인데, 성격이 불 같은 아버지가 내가 울음을 안 그치니까 개수물통에 던져 버렸어요. 대나무로 만든 통으로 물은 깊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아버지가 무서워서 겸상을 할 때 눈을 꼭 감고 밥을 먹었어요.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심화된 계기였죠.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문학과 인생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광복되던 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이듬해 마산으로 이사 갔다. 학교에서 손수 만화책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여 주면 모두들 좋아했다. 그게 즐거워 계속 만화를 그렸다. 책 가장자리에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을 한 장씩 그려서 친구들 앞에서 책을 휘리릭 넘기는 장난도 했다. 그러면 사람이 진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만화영화 기법을 깨닫고 그런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게 나중에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을 거라고 그는 짐작했다. 6학년 때는 안중근 의사 만화를 그려 교내 미술대회에서 특선을 하기도 했다.
  
  6·25 전쟁 나던 해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마산에서는 실제로 전쟁은 없었지만, 멀리서 포성이 울리고 피란민들이 모여들어 전쟁을 간접 체험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대구에서 「학원」이라는 잡지가 발행되었다. 「학원」에 산문을 보내기만 하면 독자투고란에 실렸다. 마산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李祭夏는 文才(문재)를 날리기 시작한다. 
    
  고교 시절에 만난 文學의 大家들  
  『마산동중학교의 이상철 교장선생님은 문학을 숭상하던 분이에요. 그래서 피란 와 있던 유명 문인들을 우리 학교에 교사로 많이 영입했어요』  
  金春洙(김춘수)·金相沃(김상옥) 등 토박이 詩人들과, 피란 온 金南祚(김남조)·李元燮(이원섭) 작가가 마산高에서 교편을 잡았다.  
  『金南祚 선생님은 굉장히 가늘고 예뻤어요. 책보를 들고 치마저고리 입은 모습으로 하늘하늘 교문에 들어서면 학생들이 다 껌뻑 넘어갔죠. 선생님들이 세계 명작을 통해 아름다움과 영혼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들의 문학 열정을 일깨운 거죠. 그때 콤플렉스와 힘든 환경을 벗어나는 길은 예술밖에 없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던 것 같아요』
  
  당시 「학원」 잡지는 10만 부가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제1회 학원문학상에서 李祭夏는 詩 부문에 당선되었다. 그전까지 늘 산문만 투고하다가 처음으로 詩를 투고했는데 朴木月(박목월)·趙芝薰(조지훈) 선생 눈에 든 것이다.
 

고등학교 때 쓴 詩가 국어 교과서에 실려
학원문학상은 계속 번창하여 우리나라 문인 가운데 300여 명이 그 관문을 통과했다. 당선 詩 「청솔 그늘에 앉아」는 조선일보에서 논설위원을 지낸 劉庚煥(유경환) 시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쓴 작품이다.
  『내 산문이 「학원」에 자주 실리니까 서울 경복고등학교에 다니는 劉庚煥이 나에게 친구가 되자며 편지를 했어요. 마산은 그때 인구 2만 명의 시골이었죠. 劉庚煥은 「학원」의 사진소설 모델을 해서 얼굴을 알고 있었어요. 서울에 사는 아이가 친구하자니까 흥분됐죠』
  
  「청솔 그늘에 앉아」는 열일곱 살 소년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아/혹은 하얀 햇볕 깔린/어느 도서관 뒤뜰이라고 해도 좋아/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아늑한 얘기가 하고 싶어/아니 그냥 당신의 그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어/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여/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이 詩는 1960년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학생들에게 널리 읽혔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나 봅니다. 처음 쓴 詩가 당선되고 국어책에까지 실린 걸 보면.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고독한 심사의 탈출구가 글밖에 없었죠. 작품을 보내면 실어 주니 재미있어서 한 거지』
  하루에 팬레터가 10여 통씩 서너 달 동안 끊이지 않고 왔다. 李祭夏씨는 『황금기가 빨리 왔다가 지나갔지』라며 허허 웃었다. 195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새벗」에 동화 「수정구슬」까지 당선되어 마산 학생들 사이에서 李祭夏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글을 잘 썼는데 홍익대학교 조각과로 진학하신 이유는 뭔가요.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전교에서 수석을 했는데, 고등학교 때 성적이 형편없었죠. 문학병이 들어서 공부를 안 했으니까. 성적이 안 되어서 국문과에 갈 수도 없었지만, 옛날 문학을 가르치는 국문과는 따분해서 가고 싶지 않았어요. 미술대학은 학과성적이 좀 떨어져도 갈 수 있는데다 미술을 전공하면 글 쓰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만화 그리고 그림책 보던 실력으로 데생을 했는데 합격했어요』

 

미술대학 다닐 때 詩와 소설로 등단  
 

◀ 1961년, 24세 때 李祭夏씨의 모습.  

 

 미술대학 1학년 때 바로 詩와 소설로 등단했다. 1957년에 「신태양」에 소설 「황색 강아지」가 당선되었고, 1957년부터 1958년까지 「현대문학」에 詩를 투고하여 서정주 선생의 추천을 받았다. 1958년에는 「소설계」에 「나팔산조」라는 소설을 응모했다. 
  상금이 당시 집 한 채 값이어서 응모작이 세 트럭 반이나 되었다. 결과는 李祭夏씨의 준당선작이 되었다. 잡지사에서 상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당선작 없이 상금의 반액만 주는 준당선작을 낸 것이다.
  
  『그때 150만원을 받았어요. 친구들이 한턱 얻어먹겠다고 명동의 「돌체」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 갔다가는 상금을 다 날릴 것 같아서 바로 마산으로 내려갔죠. 어릴 때 무서워했던 아버지께 상금을 모두 드리고 그동안 미워했던 죄책감을 씻었죠』
  
  1961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손」이 입선되었다.   
  ―한번 등단한 뒤에도 여기저기 응모를 많이 하신 이유가 뭔가요.  
  『뭔가 표출하고 싶고, 풀어야 하는데 풀 만한 대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각과 학생이었던 그는 2학년까지 학점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학교생활에 충실하지 못했다. 토르소를 만들 때 마지막에 헝겊을 씌우고 물을 뿌려야 하는데, 귀찮아서 물을 안 뿌리는 바람에 다음날 갈라지곤 했다.
  
  하숙비로 술을 사 마시고 찬 방에서 자면서 몸을 혹사했다가 좌골신경통에 걸리고 말았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마산 집에 갔다가 꼼짝없이 방에 드러눕고 말았다. 하필 그럴 때 軍 입대 영장이 나왔다.
  
  『나는 2代 독자라서 미리 신청했으면 6개월 만에 제대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온갖 약을 써도 낫지 않는 몸을 질질 끌고 입대했어요. 처음 훈련받을 때 거의 기어서 내무반으로 돌아왔지요. 두 달 동안 규칙적인 생활을 했더니 병이 다 낫더군요. 원래 좌골신경통이 혈행장애 신경통입니다. 군대에서 2代 독자라고 신고해서 1년 6개월 만에 제대했죠』
  
  제대 후 조각을 하면 몸이 다시 안 좋아질 것 같아 서양화과 3학년으로 轉科(전과)했다. 미술대학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글 쓰는 일에 열중했다. 대학은 5년을 다녔지만 열심히 하지 않은데다 연애사건에 휘말려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매일 명동 「갈채」에 문인들 구경하러 다녔죠. 거기에 金東里(김동리)·趙演鉉(조연현) 선생 같은 원로들부터 20代 文靑까지 다 모여들었어요. 미술대학 졸업장이 있었더라면 내 인생이 바뀌었을지 모르지. 유명화가인 南天 宋壽南(남천 송수남)이 대학 동기예요』
 

詩는 20代에 끝난다    
 

◀  윗줄 맨 왼쪽의 이제하씨 옆으로 서영은, (한 사람 건너) 김채원, 최정희 작가(1983년).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걸 후회하십니까.
『그때 좀 약게 했으면 됐을 텐데, 포기해서 고생을 사서한 거죠. 하지만 이게 (소설의) 소재가 되니까 뭔가 겪으면 재산이 불어난다는 본능이 있어요. 정식 교수로 생활 걱정이 없는 文人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작품활동에 몰두하지 못합니다. 생활이 안정되면 나태를 불러오지요』
  
  李祭夏씨는 1964년부터 成贊慶(성찬경)·朴在森(박재삼)·朴喜璡(박희진)·具滋雲(구자운) 등의 詩人이 주재하던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참여하여 詩를 썼다.  


  『30代 중반을 넘자 정서적으로 고갈이 되어 詩 쓰는 일은 중단하게 되었죠. 천부적 詩人이 아니라면 詩는 대개 20代에 끝납니다』  
  그 후부터 소설을 주로 발표하게 되었다. 1966년에 신아일보에 연작동화를 연재하고, 1967년에는 신문이나 잡지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장르를 넘나드는 활동으로 질시받아 

 


 

◀ 1981년 딸과 함께.

 

―그때부터 동화와 삽화를 그리는 등 외도를 하셨죠.
『文人들이 정말 각박하게 살았어요. 지금은 무슨 일거리라도 있지만 그때는 속수무책이었죠. 문예지 지면이 없어서 일년에 한 편 발표하는 게 고작이었어요. 원고료도 「새 발의 피」였으니 도대체가 절망적이었죠. 글만 써서는 생계를 꾸려 갈 수 없었어요』
  
  ―직장생활을 한 적은 없나요.  
  『1978년에 「월간 髓想」(「월간 에세이」 전신)에서 반 년 동안 주간으로 일했고, 1979년에 미술학교 나왔다는 연줄로 화랑협회에서 만드는 「미술춘추」 잡지의 주간을 1년간 했죠. 그 외는 없어요』
  
  잡지를 만든 경험이 소설 「광화사」의 소재가 되었고, 그 작품으로 1987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장르를 넘나드는 것에 대한 문단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외국에서는 그런 것에 신경 안 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장르를 넘나드는 사람을 흘겨보지요. 詩 쓰고 그림 그리는 金榮泰(김영태)가 홍익大 서양화과 동창이에요. 대학 때 知己(지기)를 만나서 서로 교실에 편지도 남겨 놓고 그랬죠. 질시하든 말든 내가 살아야 되니까…』 
  
  李祭夏씨는 지난 5월 문예진흥원의 지원으로 黃晳暎(황석영)·趙廷來(조정래)·黃東奎(황동규) 등의 작가들과 함께 독일에 다녀온 얘기를 했다. 우리나라는 올 10월 독일에서 열리는 프랑크푸르트 세계도서전시회의 주빈국이다. 
  
  『독일인들과 현지 교민들과 대화 시간을 가졌는데, 나에게 「여러 가지 한다는데 고통을 어떻게 헤쳐 나왔느냐」고 하더군요. 「고통을 참고 겪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다. 작가란 남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사람이지, 자기 고통에 뒹굴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도배도 하고 구들장도 놓게 되었다」고 얘기하니 모두들 박수를 치며 웃더군요』
  
  ―이것저것 했다면 결국 책이 안 팔렸다는 얘긴데, 독자가 어느 정도나 됩니까.  
  『내 책은 많이 나가야 2만 권, 보통 1만권에서 1만5000권밖에 안 나가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래요. 1973년에 첫 창작집 「초식」이 나왔을 때 넉 달 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라가서 2만 부 정도 팔렸어요. 그때 1위가 崔仁浩(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이었어요. 崔仁浩씨 작품은 100만 부 팔렸고, 내 책은 도중하차했죠』
  
  「초식」은 당시 민음사에서 발간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 팔리는 대중소설과 원로들의 창작집 정도만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초식」은 自費(자비)로 책을 냈는데,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그때부터 출판사들이 순수창작물 단행본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환상적 리얼리즘 도입

  

▲ 카페「마리안느」에서 판매하는 도예품과 부채, 저서들. 도예품은 직접 만들고 부채에는 손수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소설 경향을 어떻게 보시나요.  
  『예전부터 회화적 이미지의 소설이 많아요. 너무 앞서갔지요. 요즘은 분단을 강조해 봐야 안 먹힙니다. 일본 적개심도 집단일 때는 먹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안 됩니다. 사이버 공간이 비주얼화를 지주 삼아 움직입니다. 요즘은 노래 가사도 디테일합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식의 유장한 가사가 없어요. 
  
  지금이라면 내 소설이 먹혔을지 모르지만 너무 앞서갔죠. 내가 1973년에 「초식」을 발표하면서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붙였어요. 미술 용어에 「빈 환상파」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서 따온 건데 비평가들이 「환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면서 비웃었어요. 얼마 후 마르케스가 「마술적 리얼리즘」을 들고 나오니까 그제야 잠잠하더군요』
  
  그의 소설은 「환상적 리얼리즘」, 「광기의 미학」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문학평론가 박혜경씨는 李祭夏씨의 소설 「독충」이 발간되었을 때 『마치 뒤통수에 찬물을 끼얹듯이 그렇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독자들을 낯선 이물감의 한가운데로 내던지며, 일상적인 삶의 테두리에 길들여진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이하고 부조리한 상황과 마주서게 한다』고 평했다.
  
  ―문단에서 순수소설이냐, 참여소설이냐를 놓고 다툼이 심했는데,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1970년대 들어오면서 이념문학으로 뒤덮이면서 순수문학이 위축되었죠.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이념문학이 기가 죽기 시작하고 다시 순수문학이 머리를 들었어요. 1990년대에 여성작가들이 작품을 많이 발표했죠.   
  요즘은 20代 중반과 30代들이 소설을 쓰고 있는데, 만화세대여서 소설 패턴이 달라졌어요. 판타지 소설이 많은데 우리 코드로는 이해하기 힘들죠. 어떤 열쇠로 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바뀌었어요』


 

 


 

◀ 삽화「고양이, 사람, 말」이제하作. 

 

민중·참여文學과의 불화  
  ―제가 1980년대 말에 대학 다닐 때 운동권 소설과 노동 소설이 판을 치고 있었어요. 李선생님의 이상문학상 수상작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수업시간에 공부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작품 분석에 앞서서 『지금 이런 엄혹한 시기에 왜 참여소설이 아닌 작품을 공부하냐』며 학생들이 반발한 적이 있습니다.
  
  『집단 마비가 되어서 우스꽝스런 시대였지.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망하자 그런 사람들이 공중에 떠버렸잖아. 나도 1980년대 초에 명동선언서 낭독할 때 참석했었어요. 그때 高銀(고은)씨는 잡혀가고, 黃晳暎(황석영)씨는 숨고, 白樂晴(백낙청)씨는 끌려가고 할 때였죠. 그런데 그 자리에 가보니 하는 꼴들이 이상해서 참여하지 않았어요. 외제 바바리 코트 깃을 세우고 얼마나 으스대는지들…. 
  
  화가 나서 「너희들이 하는 리얼리즘과 다르게 써 보이겠다」고 하여 쓴 게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입니다. 리얼리즘 소설은 사건을 꼼꼼하게 기술하는데, 나는 시나리오 기법으로 쓰면서 리얼리즘에 초현실주의를 가미했지요』
  
  당시 그는 이상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민중이라는 것이 어느 일부 계층의 전유물일 수는 없고, 콤플렉스 때문이건 실제 노동이 하기 싫어서건 민중을 전담해서 떠드는 특수계층도 있을 수 없으며, 내가 개체로서의 한 민중이기 때문에 그들의 등에 업힐 수는 없다』고 말해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민중을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가소롭게 느껴지더군요. 내가 보기에 진짜 민중을 생각한 사람은 박노해입니다. 고생하면서 터득한 저항이죠. 金芝河(김지하)씨는 진정성이 있어요. 그 외에는 민중을 등에 업은 특권층들이죠. 정말 민중이 되려면 노동자나 농부가 되어야죠. 현실에 뛰어들긴 싫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떠드는 걸 보고 뒤틀리더군요. 박노해·金芝河 이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들은 지금 공중에 붕 떴어요. 작품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저항할 수도 없고…. 사실은 지금이 저항소설을 쓸 때입니다』


 

전부 밟는 건 빨갱이식 처신  

 ―문단 내에 여러 단체가 있는데 어디 참여하십니까.  
  『섹터 만들어서 「와와!」 하고 공동발언하는 거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혼자 純문학에 병처럼 파묻혀 있지요. 혼자 있으니 빤히 들여다보여요. 가짜들이 많아요. 개중에는 작품은 순수한데 휩쓸리는 사람들도 있어요. 
  
  서정주·김동리 같은 스승을 親日이니 보수니 하면서 매장하려는 사람들도 있어요. 스승을 밟으려는 사람들은 그래야 자신들이 드러나니 칼을 꽂는 거죠. 윤리적으로 용납이 안 돼요. 親日을 하여 오점을 남겼더라도 서정주 선생의 작품만 한 詩가 없어요. 김동리 선생이 우익이라고 해서 작품을 매도하면 안 됩니다. 「산하」나 「바위」 같은 작품은 저항적인 작품입니다. 작품은 인정해야지 전부 밟는 건 빨갱이식 처신이죠. 두 분은 큰 기둥입니다. 작품이 아닌 처신으로 욕하는 건 말초적이고 지엽적입니다. 그건 이념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그런 게 너무 싫어요』
  
  ―소설가협회는 가입하셨나요.  
  『文靑 때 가입하라고 해서 이름은 들어있어요. 「밤의 수첩」을 발간할 때 서문에 「개도 안 쳐다보는 文協」이라고 썼어요. 그것 때문에 또 말이 많았죠』
  
  1974년에는 「초식」이 현대문학상 수상작이 되었다. 하지만 李祭夏씨는 당시 그 상을 거부했다. 『나눠먹기식 문학賞의 행태와 문단 어른들의 文協 선거 감투싸움에 환멸을 느껴서 수상을 거부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편집장이던 金洙鳴(김수명)씨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으나, 수상소감이 써지지 않아 결국 상을 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보내 상도 받아 오고 상금도 받았는데, 나는 그것도 안 했어요. 상금은 받아도 됐는데(웃음)…. 지금 생각하면 참 고지식하게 살았지』
  
  ―살다 보면 남을 의식해야 할 일도 있지 않나요.  
  『무엇 때문에 의식해. 예술하는 사람이 남의 눈치 봐서는 안 돼요』

 

  ―저항소설을 쓴 일이 있습니까.
  
  『「초식」이 朴正熙 대통령의 독재정치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파워에 대한 혐오, 적대감이 그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한 거죠. 朴대통령은, 독재는 독선적이고 매도해야 하지만 경제 쪽으로는 공이 많아요. 양 단면이 같이 드러납니다. 우리 사회를 흑백논리로 재단하면 전부를 조망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선한 면, 악한 면, 우스운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세계를 가난과 부자로 나누는 식은 안 됩니다. 단선적이고 단세포적으로 세상을 나누면 벽에 부딪히죠』
  
  ―문단에 친한 분들은 있나요.  
  『친한 사람이 없어요. 평론도 안 들여다봐요. 내 작품에 대해 金允植(김윤식)·金華榮(김화영)씨와 故人이 된 김현씨가 관심을 가졌죠. 
    내 작품은 거론도 잘 안 돼요. 어려우니까 비평가들이 꺼립니다. 회화적인 요소를 알고 정신분석에 능해야 해명되는 소설이 많아요. 무의식과 초현실주의를 아는 비평가가 별로 없어요. 접근이 어려우니까 몇 사람만 언급을 하고 그쳤죠』
 

여자친구가 많은 남자

 


 

◀ 그림이 빼곡한 자택에서(2002년).

문단에 친한 사람이 없다지만, 李祭夏씨 카페와 자택에 여성작가들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설가 申京淑(신경숙)·김형경, 詩人 黃仁淑(황인숙)·조은·조윤희 등 여러 작가들이 종종 李祭夏씨 집에 모인다. 기자도 2년 전 그의 생일 모임에 한 번 갔는데, 30여 명의 여성작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주로 얘기를 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듣는 쪽이다. 
  
  ―여성작가들과 친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나는 여자친구들이 많아요. 남자들은 「승진, 한턱 먹은 얘기, 한탕 할 얘기」 이 세 가지밖에 없어요. 나른하고 재미없지요. 여자들은 일상적인 사소한 얘기를 많이 해요. 나는 사회 돌아가는 걸 그들에게서 들어요. 내가 얘기를 들어줄 만한 상대라고 생각하는지 편하게 얘기들 해요. 원래 비슷한 나이끼리의 남녀가 만나면 긴장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나에게 남의 얘기를 듣는 재능이 있나 봐요. 바깥 공기를 거기서 알지요』
    

환갑에 가수 데뷔
  
李祭夏씨는 1998년에 「빈 들판」이라는 CD를 발표했다. 총 10곡이 들어 있는데,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라는 노래는 조영남씨가 리메이크하여 자신의 CD에 수록했다. 1998년이면 그가 환갑을 맞은 해이다.
  
  ―환갑의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시다니 굉장한 일 아닌가요.  
  『애들 장난에 말려든 거야. 1980년대 중반부터 코드 열댓 개 익혀서 놀러가면 기타 치고 노래하곤 했어요. 내가 자주 가는 카페 「나무요일」에 오는 사람들이 내 환갑에 CD를 선물하자며 돈을 모았나 봐요. 
  
  이미 만들어 놓은 몇 곡에다 부랴부랴 몇 개 더 만들어서 녹음한 거죠. 「나무요일」 주인의 친구인 「동물원」 멤버 유준열씨 녹음 스튜디오에서 댓바람에 만든 거죠. CD가 나온 뒤 100명 정도 모인 자리에서 콘서트도 했어요』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1987년에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그때 주제가인 「빈 들판」을 그가 만들고 노래했다. 장난 삼아 흥얼거린 걸 녹음했다가 채보해서 노래를 만드는 정도라고 했다.  
  ―남들은 어렵게 해도 안 되는데 선생님은 「장난 삼아」, 「먹고살려고」 하면 다 되는 게 신기하네요.  
  『애들 장난에 말려들어 끼가 발동한 건데 뭐. 자꾸 또 내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담배 끊고 몇 달 목소리 가다듬어야 하는데… 제도권에 직장이 없으니 뭐하면서 소일할까 하는 식으로 하다 보니 노래도 만든 거지 뭐』
  
  「빈 들판」은 그냥 아는 사람들끼리 나눠갖기 위해 500장을 만들었다가 「나무출판사」에서 제작하여 시집과 함께 발매했다. 지금까지 모두 1만5000장이 팔렸다. 그는 회갑 때 「질주」라는 작품집을 김채원·구효서·윤대녕·최승호·김혜순·황인숙·장석남·허수경·조은·이진명 작가 등으로부터 헌정받았다. 
  
영화칼럼은 소설쓰기가 지겨워서 시작했다고 한다.  
  『1990년대 초에 내가 비디오를 모은다는 소문이 났는지 한국일보에서 영화칼럼을 쓰라고 하더군요. 소설보다 쓰기 쉬우니까 쓴 거죠. 3년 동안 매주 한 편씩 신문에 낸 걸 모아서 영화칼럼집을 두 권 냈죠』   
  충무로 지하상가에서 희귀영화 LD를 사서 본 다음 비디오로 복사를 한 게 1500개나 되었다. 1500개를 처분한 뒤 다시 모은 게 1300개에 이른다. 토요일이면 카페에서 영화감상회가 열리기도 한다.   
  1990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서울예술大, 명지大, 추계예술大를 거쳐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드라마 쓰기, 작가연구, 글쓰기 등을 가르친다. 대학 강의 역시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라고 했다.
    
  도예와 글자체 만드는 일에 도전 


 

李祭夏씨의 길손체. 폰트화를 추진하고 있다.

  요즘 그는 그림을 직접 그린 도자기를 구워 카페에서 팔고 있다.   
  『주방에 가마를 하나 설치했어요. 팔기도 하고 선물로 주기도 하고. 부채를 자꾸 그려 달라며 10만원을 갖고 온 사람이 있어서 부채에도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이것도 다 먹고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하는 거지(웃음)』
  
  李祭夏씨는 1982년과 1994년에 개인전을 열었고, 1998년에는 詩人 김영태씨와 2인전을 개최했다. 올 9월쯤 카페를 전시회장처럼 꾸며 그림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일을 정말 많이 하시는데 지금 재산이 얼마나 되나요.  
  『재산(웃음)? 「마리안느」밖에 없지. 집도 없어요. 「마리안느」가 잘 되면 나도 사는 거고, 「마리안느」가 망하면 나도 망하는 거고…. 그러니까 손님들 좀 많이 오라고 해요』  
  곧 목청을 가다듬어 노래도 하고, 토요명화 감상회도 계속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토요일이면 「마리안느」에서 그림 개인지도와 글쓰기 지도도 하고 있다.
  
  요즘 그는 또다시 새로운 분야에 손을 댔다. 자신의 글씨를 인터넷에서 폰트화 하려는 작업이다. 李祭夏씨의 인터넷 아이디 「길손」을 따서 「길손체」로 명명한 글씨는 이미 북디자인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1990년 초부터 50여 권의 북디자인을 하면서 길손체로 표지를 만들었다. 자신의 책은 거의 대부분 자신이 디자인하는 그는 하덕규·박인희씨의 시집 표지도 길손체로 장식했다. 
  
  길손체가 일반으로부터 주목받은 것은 자주 찾는 인터넷 사이트(poowa.com)에 직접 쓴 연하장을 올리면서부터다. 글자가 예쁘다며 네티즌들로부터 폰트로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현재 폰트화하기 위한 작업이 거의 끝난 상태인데, 한글의 경우 자음과 모음을 써서 조립한 게 아니라 2780자를 일일이 다 썼다.
  
  『자음과 모음을 기계적으로 조합하면 제대로 맛이 안 나서 고생스럽지만 다 썼어요. 한자는 3800字를 넣을 계획인데 현재 반 정도 썼습니다. 단순히 본문으로만 쓰려는 게 아니라 책 표지 등에 쓸 수 있는 題字用(제자용)으로 만들기 위해 작업을 한 거죠. 몇몇 업체와 폰트화를 논의하고 있어요. 길손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서예전을 곧 열 계획입니다』
  
  李祭夏씨는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폰트가 있지만 예쁜 게 별로 없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이철수 체」가 예쁘다고 평가했다.  
  ―다양한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아 스트레스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가 많아요. 문학병·예술병에 걸려 내 욕심만 추구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살다 보니 정상적으로 거두어야 할 것을 못 거두었다는 회한이 있지요. 일종의 패배자일 수도 있죠.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 그렇게 살겠죠. 하지만 자식으로서, 家長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못 한 게 안타깝죠. 돌이켜보면 이기적인 삶을 살았어요. 중학교 때 걸린 문학병 때문입니다』
  
  마리안느를 좋아하는 영원한 청춘

2000년에 발간한 「독충」은 15년 만에 독자들에게 선보인 작품집이다. 「문학동네」에서 소설전집 12권을 내기로 계약한 뒤 6권밖에 못 냈다고 한다.
  
  남성작가들은 다 서리맞았고, 1990년대에 잘 팔리던 여성작가들까지 책이 안 팔린다고 걱정했다.  
  ―책이 안 팔리면 소설가들은, 앞으로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독자가 없으면 문학은 죽어요. 네티즌들이 쓰는 말을 문학언어로 바꿔야 합니다. 요즘 애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고 다가갈 방법을 생각해야지요. 겪지 않은 세대에게 역사의 비극을 강조해도 소용없어요. 현대는 미래적인 환상과 비주얼을 갖고 살아갑니다. 우리나라 문학은 심각한 강박관념에 몰려 있어요. 너무 어깨에 힘을 줍니다. 일본은 아주 디테일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제도권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양한 일을 하고 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혼자서 먹고살아야 하니 기운 차리고 살았지. 필사적으로 먹고살 짓을 했지』  
  ―결국 그게 삶의 에너지가 되었네요.
  
  『좋은 거지. 먹고살려고 하면 속이 편한데, 난 예술가입네 작가입네 화가입네 나서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나는 유한계급들을 안 믿어요. 살아 있는 동안 노력해서 먹고살아야죠』 
  
  ―아웃사이더로 산 것에 후회는 없습니까.  
  『기분 좋지 뭐. 소속되고 편입되는 거 끔찍하게 싫어하니. 가난했지만 유유자적했으니…』  
  문득 카페 이름을 왜 「마리안느」로 지었는지 궁금했다. 
  
  『영국 가수 마리안느 페이스풀 이름에서 따왔어요. 롤링 스톤스의 리드보컬 믹 재거와 열애에 빠지며 섹스와 마약을 탐닉했었죠. 폐인이 된 후 재기하였을 때 목소리가 아주 매력적인 허스키로 바뀌었어요. 삶과 목소리가 인상적이고 마리안느라는 이름이 어감이 좋았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내 청춘 마리안느」라는 영화가 크게 히트를 했는데, 그 여주인공도 멋있어서 그렇게 정했죠』  
  허스키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그가 바로 「아직 청춘인 마리안느」라고 생각되었다. [출처 : 월간조선 2005  8월호]

 

또 한번 동백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번 모란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써니 2012-10-21 (일) 13:54

이제하 vs. 조영남 




미술전공한 소설가와 음악전공한 화가 이야기

가수 조영남은 소설가 이제하의 팬이다. 이제하의 노래 <모란 동백>을 조영남이 리메이크해서 무대가 있을 적마다 빼 놓지 않고 부를 정도다. 최고의 노래를 만든 최고의 문인이라 칭찬하면서 말이다. art는 두 사람이 만나는 중매쟁이 노릇을 했다. 미술, 문학, 영화, 음악을 아우르는 전방위 예술가들이 만나면 어떤 얘기가 오가게 될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학로의 카페 마리안느. 살이 토실 오른 강아지가 호들갑스럽게 먼저 들어왔고, 벙거지 모자를 쓰고 청바지에 청남방을 걸치고 그가 들어섰다. 가슴이 두근, 했다. 천재라 불리는 문인이자 카페의 주인인 이제하다. 곧이어 등산복 차림의 조영남이 효자손 하나를 들고 들어섰다. 스스로를 광대라 부르는 화가 겸 가수. 천재와 광대는 에디터를 사이에 두고 처음 말을 시작했다. “이 효자손 선생님 드리려고 산거니 전해 주슈” “뭐. 이런 걸….” 그렇게 만난 후에 커피와 얼음 넣은 콜라를 사이에 두고 그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조영남(이하 조) 이 선생님 생에 돈을 제일 많이 번 때가 언제예요?
이제하(이하 이) (웃음) 뭐, 문학상 두어 개 받을 때, 그때 아닌가요?

 한 얼마쯤?

 1985년도에 이상 문학상이 500만 원이고, 한국일보 문학상이 500만 원인가 그랬을 거예요.

 인세로는 500만 원 못 받으셨어요?

 아유. 책 팔아서 어떻게 돈이 돼요. 그러고 보니, 내가 20대일 적에 ‘삼중당’이라는 출판사가 있었어요. 거기서 《소설계》라는 중간 소설지가 나왔어요. 그때 시로 문단에 잠깐 얼굴을 내밀고, 소설 쪽으로 한번 당선이 됐어요. 그런데 거기서 현상금을 엄청 많이 걸고, 단편을 공모했어요. 그때 응모작이 한 트럭 반이었다고 해요. ‘삼중당’의 시인 이기동이라는 분이 주관을 하셨는데, 그때 〈나팔산조>라는 연애소설을 투고해서 당선이 됐어요. 그런데 당선작 상금이 감당이 안돼서 나중엔 ‘준 당선’이라고 해서 금액을 많이 깎았을 거예요. 줄 돈이 없어서…. 

 얼마였기에 그랬대요?

 150만 원인가 그랬을 거예요. 그때가 1958년이었어요. 그 당시로는 굉장히 큰돈이었죠. 집 한 채 값이죠. 따져보니 그 때 받은 돈이 제일 컸던 것 같네요.

 500만 원 인생이셨구나.

 (웃음) 조형은 제일 많이 번 때가 언제예요?

 지금 저는 한 50억 짜리 집에 살아요. 

 (웃음) 이석주 씨가 가끔 그쪽에 놀러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잠깐 들었어요. 집이 좋다고..

 아. 석주 씨 지금 통화 되면 오시면 좋았을 텐데…. 제가 이 선생님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세요? 미국 가서 공연하다가 톨리도 오하이오의 조그마한 교회를 방문했어요. 그 모임에서 유난히 ‘깔깔깔’ 웃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분이 마종기예요. 그 분하고 친하게 되면서 이제 시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한 거예요. 하루는 마종기 선생이 아주 슬프게 얘기하시는 거야. 자기가 서울 고등학교 다닐 시절에 마종기, 황동규가 글을 제일 잘 썼대. 근데 마산에서 어떤 학생이 글을 올려 보냈는데, 자기들이 꼼짝 못하겠더라는 거예요. 그게 이제하 선생이었어요. 그러면서 대학교 들어가고 군대 갔다 오니까, 이미 자기네 글하고 이제하 글하고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대요. 충격이었다고 합디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연구를 했어요. 그런데 내가 봐도, 여타 다른 당대의 문인들은 이 선생님과 게임이 안됐어요. 선천적으로 글을 잘 쓰시는 것 같아요. 국문과 출신도 아니고, 아무 백그라운드도 없는데…. 

 고맙긴 한데,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잘못 알 수도 있죠. 그런데 왜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사실 내가 글을 제일 잘 쓰는 것도 아니고, 《학원》(10만 부가 발행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던 잡지)때만 해도, 마종기, 황동규는 시 쪽이었어요. 나는 산문 쪽이고. 그때 마종기가 사진 소설에 기재한 글이 있었어요. 그림 대신 사진이 나오는 코너였는데, 가끔 거기 모델로 유경환이 나왔어요. 이쁘장하게 나오는 사진들을 보고 굉장히 선망을 했었죠. 매달 독자 문예 투고하는 사람이 사진까지 나오니까. 그때 나는 중학교 3학년부터 산문을 투고해서 매달 《학원》에 글이 실리곤 했는데, 고등학교 올라가자마자 ‘유경환’이라고 경복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편지를 보냈더라고요. 친구가 되자고, 펜팔하자고요. 그 편지를 받고 너무 감동한 거야. 서울의 유명한 고등학교에서, '사진소설‘에 모델로 나오는 사람이 편지를 주니까. 그 감동으로 쓴 시가 처음으로 쓴 거예요. <청솔 그늘에 앉아>라고.  

 그게 교과서에 실린 시죠?(이 시는 1960년대 국어 교과서에 실려 학생들에게 널리 읽혔다)

 네. 어떤 사람들은 여학생한테 받은 편지를 가지고 쓴 거라는 소리를 하는데, 유경환에게 받은 편지였어요. 그 시를 투고했더니, 황동규, 마종기가 입선하고, 저하고, 김동길이 학원문학상을 탔어요(학원문학상은 계속 번창하여 우리나라 문인 가운데 300여 명이 그 관문을 통과했다). 아마 그래서 그 양반이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음. 아니예요.

 그리고 황동규는 그 일 때문에 내가 보기에는 조금 삐쳤어요. 갑자기 산문 하던 사람이 시를 투고해서 당선이 되니까, 아마 그때 삐쳤을 거예요. 자존심 상해서.

 그런 게 있어. 시인들이 쪼잔한 게 있거든요.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글 쓰는 사람은 알잖아요. 마치 내가 노래하니까 노래하는 사람이 쟤가 노래를 잘하나, 못하나 ‘본능’적으로 아는 것 처럼요. ‘본능’적으로 쓴 글하고, 연구하고 글자를 맞춰 쓴 것 하고는 차이가 난다 이 말이죠. 본능적인 사람은 못 이겨요. 왜인고하니 본능 속에는 음악이 있거든요. 소설 전편을 읽어도, 언어가 떠 있다고. 언어가 ‘유희’하는 거죠. 지금까지 본 글 중에는 그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 이제하랑 죽은 기형도예요. 기형도의 일기나 편지 같은 것 보면 글이 막 날아 다녀요. 제가 국문학을 배운 적도 없고, 그냥 읽고 느낀 생각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선생님을 한번 만나 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트 인 컬처》덕에 이렇게 만나 뵙게 되네요.

 나에 대한 인상이 희한하게 어딘가에서 매듭이 딱, 지어진거 같아. 제가 글을 잘 쓴다기보다는, 매일 바뀌어요.(웃음) 날에 따라서도 달라지고요. 잘 쓰는 분들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가령, 누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시는데요?

 우리나라에는 PR문제나 지연이니, 학연이니 하는 관계가 정립돼 있는 바람에 90점, 100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가, 70점 밖에 못 받는 경우도 있고 그래요. ‘서정인’이라는 작가가 있어요. 굉장히 점잖은 분이신데, 전북대학교 학장도 하고 그러셨어요. 김승옥 등의 작가 분들과 사무실 동기셨는데, 소설이 굉장히 단단해요. 김승옥 씨만 알려지고 서정인 씨는 나서질 않아서 사람들이 몰라요. 실력에 비해 평가를 덜 받고 있어요. 그런 작가들이 많이 있어요. 해가 지나고, 나이가 들면, 잘 써질 때도 있고, 못 써질 때도 있고 그래요.





그림을 쓰는 것

 김승옥 씨 같은 경우에는 젊었을 땐 한 때 잘 썼는데, 중간에 가서는 별로였다는 거죠. 쉽게 얘기하면,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수석 했다가, 2학년 때 중간정도하고, 3학년 때 꼴찌 하는 거랑 같은 거예요. 글이 일관성 있는 건 선생님이세요. 그게 왜 가능하냐면 선생님이 그림을 알기 때문이죠. 그림을 안다는 건 굉장한 차별화가 되는 것 같아요. 제 눈엔 작가들이 쓰는 것에 너무 의식을 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이 선생님은 영화를 쓰고 싶으면 쓰고, 시를 쓰고 싶으면 쓰고 하시잖아요. 글이라는 건 이렇게 돼야 한다는 거죠. 그게 진짜 ‘글’이라는 거죠. 무슨 눈치보고 이게 좋은 책이라고 하니 쓰는 식. 전부 그 모양들이라는 거예요.

 문학에서는 번역된 게 반 밖에 오지 않아요. 원문의 반 정도도 안 오죠. 그림은 그런 장벽이 없잖아요. 그림은 무슨 ‘표현주의’니 무슨 양식이니 해서 설명이 가능한데, 문학은 사실 그런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그림은 빠르고, 말이 필요 없는 거죠. 저 같은 경우는 그런 것을 문학에 접목시키면 되니까, 조금 빠른 느낌이 드는 거겠죠.
 음악하고 미술은 ‘건축’인 것 같아요. ‘만드는 것’이니까요. 한 화면을 메우고, 설계한 것 위에 만들어 가는 것. 글을 쓰는 사람한테는 설계가 없어요. 그런데 그림을 알면, 설계가 반드시 본능적으로 있게 된다는 거죠. 시를 그림으로 만드는 거죠. 그림이 시가 되구요. 그냥 시를 쓴 사람하고, 그림으로 시를 쓴 사람하고 완전히 다르다는 거죠.

 그럼 조형은 언제 음악에서 그림 쪽으로 관심을 가졌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쭉 음악이랑 미술을 같이 했어요. 오히려 노래가 저한텐 문제시 되지 않았고, 그림은 늘 “어떻게 하면 잘 그릴까” 하는 고민거리였죠. (조영남은 고 1때 교지 제작의 삽화 담당이었다는 것과 고 3때 미술부장을 했다는 것 외에 별다른 미술수업을 받은 기록은 없다. 하지만 군대에서 서울대 미대를 다니던 김민기를 만나 실기실을 드나들다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울대 미대의 윤명로 선생과 이화여고의 김차섭 선생의 도움과 격려로 1973년 한국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갖는다. 이후 약간의 공백기-물론 작업은 계속했지만-를 두고 1990년부터 미국과 한국 등지에서 활발한 전시 활동을 하고 있다) 만일 내가 글을 잘 쓴다고 하면, 다 그런 함수관계가 있어서, 남들하고는 다른 글을 쓸 수 있는 걸겁니다.

 그럼 왜 미술 쪽으로 안가고, 노래를 했어요?

 미술은 돈벌이가 안 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당시로도 미술보단 음악이 좀 나았어요. 지금도 그림만 그려선 생활 못하지만요. 선생님은 어떻게 미술을 하시게 된 거예요?

 사실 미술에 관심이 있긴 했지만 문학에 병이 들어 있었죠. 중·고등학교 때 문학에 빠지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산에 들어가서 책 읽고, 낮잠 자고 하다보니까…. 《학원》때문에 교장 선생님이 학예부장을 시켜주셔서 낙제는 면했죠. 그 정도로 교실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근데 그 성적 가지고 어디를 가겠어요. 그 당시 홍대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상경대학 건물만 하나 있는 정도였어요. 그렇게 가난한 대학이었으니 원서만 내면 거의 되다시피 했었죠.

 그러면 글은 독학하신 거예요?

 글이야 중학교 때부터 《학원》에 투고하고 했으니까, 쭉 해왔던 거고…. 막상 대학을 가려니 어디 성적이 안 되니까 홍대미대를 지원한 건데, 그것도 겁이 나서 서양화과를 못 넣고 경쟁이 덜한 조소로 넣었어요.(복학 후에는 서양화과 3학년으로 전과했다)  당시 홍대 학장 했던 김환기 선생이랑, 마산으로 피난 왔던 김남조, 이원섭 선생하고, 마산 토박이이신 김춘수, 김상옥 이런 분들의 영향이 굉장히 컸어요. 자꾸 그 쪽으로 가라고 해서 겸사겸사 홍대로 갔던 거예요. 근데 한번 든 ‘문학병’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야지. 미술도 열심히 안하고, 돌아다니고 노느라고 학교에 관심이 없었어요. 2학년 때까지 학점이 있다는 걸 몰랐다니까.(웃음) 뭐, 이런 얘기를 하면 다들 웃더라고…. 이제 2학년 지나서, 학점 따야 된다고 얘기를 들으니까, 너무 난감한 거예요. 근데 유급은 안 시키고 또 4학년까지 어떻게 또 올라갔어요.(웃음) 군대 가서 제대하고, 다시 3학기 내려와서, 3학년부터 다니는 식이었죠. 그게 1959년, 1960년 그 무렵 이예요. 그 당시 학교 주변이 완전 논밭이었어요. 비오면 장화신고 다니고….

 그런 와중에 어떤 분이 문학을 붙잡게 하셨나요?

 황순원, 서정주 같은 원로작가들 덕분이었죠. 굉장히 좋은 분들이었는데, 이제 그런 분들은 없어요. 그래서 문학하는 젊은 사람들이 갈피를 못 잡고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미대생이 문학을 붙잡고 있었으면, 웃겼겠어요. 그때.(웃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문학에도 형식적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거죠. 미대가 좋잖아요. 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그리기 싫으면 집에 가면 되고….(웃음) 지금처럼 엄격하지 않았어요. 그냥 내버려 두면서 공부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다고요.

  




문단에 등장한 미대생


 그럼, 선생님. 처음 등단한 게 몇 살 때예요?

 고등학교 3학년 졸업하고, 《새벗》이라는 잡지에 동화 <수정구슬>이랑 동시 <눈 오는날>이 동시에 당선됐어요. 대학교 1학년 때 《현대문학》에 서정주 선생님 추천을 받으면서 등단했죠. 졸업을 갓 했을 때 신춘문예에 <손>이 당선됐고. 군대 제대하고 나서 투고를 했던 거예요. 모든 게 1950년대 말, 1960년 대 초에 이뤄진 일이죠. 당시 서울이 가난했어도 낭만적이고 데카당한 분위기가 있었어요. 김수영, 전혜린, 김관식이 돌아다니던 시기잖아요. 사람들이 충동적이고, 이상한 짓도 많이 하는 재미있던 시절이었어요. 지금 사람들은 실속 없으면 안하려고 하고, 낭만적인 만남도 가지지 않고, 사무적인 관계만 갖는 걸로 변했죠.  

 그럼 소설은 언제 썼어요? 

 소설은 시랑 거의 동시에 썼죠. 《학원》에 산문과 시를 투고하던 버릇이 남아서, 한 해 차이로, 현대문학 추천을 받아서 《신태양》에 <황색 강아지>란 소설로 당선되고 나서도 한동안 시를 썼어요. 성찬경, 박재삼, 박희진, 구자운 등이 있던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참여하면서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하니까, 이상적인 면이 현실적인 쪽으로 바뀌면서, 시가 안 써지는 거예요. 그래서 소설 쪽으로 쓰다 보니까, 원고료도 좀 낫고. 조형이 먹고 살기 위해서 뭐라도 하는 그거랑 비슷하게 된 거지.

 그때 <광화사>나 <그림쟁이> 같은 소설을 쓰면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한국일보 같은 경우에는 신문연재소설을 쓰는데 제약이 없었어요.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써라 그런다고. 그것 때문에 쓴 거야 사실은. 그때 연재소설도 딱 한번 쓴 거예요. “사기꾼 얘기를 쓸거냐, 그림쟁이 얘기를 쓸거냐”묻길래 ‘그림쟁이’를 쓰겠다 한 거죠. 다른 곳에서는 데스크나 독자의 반응을 봐서 참 잔소리를 많이 해요. 그래서 신문에서 소설 쓰던 사람들이 본격소설을 쓰기가 힘들어요. 한국일보에서는 그런 게 없었으니까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었죠.

 원고는 제때 갔다 줬어요?

 원고도 제때 갖다 주고, 원고료도 받고 했으니까, 그때가 제일 좋은 세월이었죠.

 물론 ‘문학병’이 있다고는 하셨지만,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다니셨으니까, 당시 주변 화단 분위기에도 관심이 있으셨겠네요? 또 어떤 그림에 관심이 있으셨어요?

 그 당시 박서보씨가 3~4년 선배셨는데, 그때 ‘앵포르멜’을 배워 오셔서,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하셨죠. 지금은 ‘이론’을 가지고 싸우지만, 그때는 주먹다짐하는 식이었다고.(웃음) 그 분위기는 일화를 들면 알거예요. 대구의 한 친구가 조그마한 하숙방에 그림을 그린답시고 야심만만하게 150호 짜리 왁구를 짜서 그림을 그렸는데, 방문이 좁아서 들고 나가질 못했어요. 그래서 어쩌겠어요. 그림을 부셨지. (웃음) 넌센스였죠. 

 학교 다닐 때는 어떤 그림을 그리셨어요?

 초현실주의,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어요. 독일 표현주의 같은 굉장히 강렬하고, 감정적인 그림들.

 표현주의 중에서도 어떤 작가들에 영향을 받으셨어요?

 뭉크나 나중에 나온 프란시스 베이컨 그리고 몽환적인 그림을 그렸던 델보. 그때 델보의 <손>이라는 작품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 시골에서 올라와, 학교 도서관에서 델보의 화집을 처음 봤는데, 그 적나라한 누드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요. 그 충격이 나중에 <손>이라는 작품으로 표현됐어요. 그래서 제 문학작품도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쪽으로 빨려 들어 간 거죠. 내 소설의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부분은 거기서 나온 거예요. 외국문학은 번역이 잘 안 돼 있으니까, 영향을 잘 못 받는데, 그림이나 음악은 영향을 쉽게 받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첫 창작집이 나왔을 때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니까, 평론가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라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환상하고, 리얼리티하고 공존할 수 있냐”는 건데, 몇 년 후에 마르케스가 나오고 하니까, “아, 이런 게 있는가보다” 하는 거죠. 저는 이게 다 미술 쪽 영향이었어요. 우리나라 평론가들도 외국의 제대로 된 경향들을 공부하고 다양하게 볼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리얼리즘’하고 ‘모더니즘’, 그것밖에 없어요. 손창숙 씨가 ‘표현주의’ 비슷한 소설을 쓰다가 좌절당했거든요. 일본만 하더라도 여러 갈래가 많은데 말이예요.

 우리나라 이론은 절음발이예요. 초현실주의도 다다도 전혀 없고…. 예전에 미술잡지도 만드셨다면서요?

 《미술춘추》라고, 화랑에서 나온 계간지 미술잡지를 만들었어요. 박주환 씨가 1년간 회장하고 계속 만들다가 “전람회 준비를 해라, 도와주겠다.”라고 해서, 부랴부랴 준비를 해서 첫 개인전을 했었죠. 그렇게 개인전은 두 번을 하고, 김영태하고 드로잉전을 한번 하고, 세 번 정도 전시를 했어요. 

 그럼 그림으로 돈을 버신 적도 있어요?

 에이, 우리는 뭐 아직 화단 쪽에는 거의 알려 지지도 않았고, 글 쓰는 사람이 그림을 그리니까, 가난한 시인들, 주위 친구들이 가져간 거예요. 70만 원, 80만 원.(웃음) 이런 식으로 도와주는 거죠. 요새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이 조금 있다지만 아직도 그림으로 생활한다는 건 말이 안돼요. 조형도 마찬가지죠? 그림 많이 팔아요?

 생활이 안 되죠. 제 그림은 너무 추상적이고, 공상적이니까, 한국 사람들이 아직도 질색해요.

 요즘 문단 쪽 콜렉터들이 내 그림을 모으겠다고 해서, “야,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있었어요. 매달 하나씩만 그리면 가져가겠다고요. 근데 친구들이 다 가져가요. 비싸봤자 100만 원, 70만 원 이런 식으로.






그리고 영화, 음악

 영화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셨어요?

 영화 안 좋아 하는 사람이 없죠. 근데 고등학교 때부터 땡땡이 치고 자연스레 접하는 게 영화였죠. 내가 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비디오도 모으
고, 한 때는 소설 작품으로 먹고살기가 점점 힘들어진 적이 있었어요. 한 달에 한 편씩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던 차에 한국일보에서 영화 칼럼을 써달라고 해서 썼던 적도 있었죠.

 내가 일찍 만났으면 선생님과 무지하게 친했을 것 같은데, 다 늙어버렸네. 저는 〈글루미 선데이〉, <그녀에게> 좋아하거든요. 최근엔 <바벨>이 좋았고. 요새도 영화 많이 보세요?

 영화는 하도 많이 보다보니 지겨워서 안 봐요.(웃음) 요즘 아이들, 전부 다운받아서 보잖아. 개봉 안한 거 다운받아서 보고, 몇 개씩 다운받아놓고 보고. 
 선생님이 기억나는 거, “아, 이 영화는 정말 좋았다.” 이런 거 있으세요?

 뭐, 〈오르페〉, 〈제3의 사나이〉같은 거. 한창 야단법석이 났던 영화들인데, 그 나이 때, <제3의 사나이>가 왜 좋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몇 번 보니까 알겠더라구요. 멜로물인데도 상당히 좋아요. 그 다음에 <길>이 나오고, 그때 뭐 한창 <태양은 가득히> 같은 거 나오고. 그 <집시의 시간>도 좋고. 

 아. 너무 많죠.

 그 다운받는데 보니까 <아귀레, 신의 분노>라는 <지옥의 묵시록> 원본이 다운이 돼서 깜짝 놀랐어요. 그게 문화원에만 내주고, 일반적으로 비디오로도 안 나와 있거든요.

 컴퓨터를 하세요?

 그럼요. 홈페이지도 내가 다 관리하는데요. 뭐.(웃음)

 그럼, 컴퓨터로 글 쓰세요?

 네, 안 될 거 같죠? 근데 독수리 타법으로 상당히 빨리 쳐요.(웃음) 

 지금, 기타는 좀 치세요?

 기타는 못 쳐요. 코드만 몇 개 알아서, 기본적인 것만 치는 거지. 근데 주위에 기타 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기타 쳐 주는데 재미있어요. 

 저는 <모란 동백>(원제는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라는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조형 마음에 닿은 건 나이가 드니까 그랬을 거요. 

 그렇죠? 제 장례식에 그 노래를 틀 것 같아요. 음반은 어떻게 내시게 된 거예요? 

 그건 젊은 애들 장난에 말려들어서 만들게 된 거예요. 자주 가던 단골카페에서 ‘동물원’의 유준열 씨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조그만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어서 내 환갑 기념으로 음반을 하나 만들어보자고 돈을 모았대요. 해서 말려든 거죠.

 지금 한 번 들어보죠.

 왜 또 그걸 들어. 웃음거리만 되게. 경상도 발음 때문에 골치 아픈데.
(이 시점부터 CD로 이제하 선생의 음반을 듣기 시작했다. 대담 진행 중 계속 노래를 틀어뒀다)

 <모란 동백>은 이 선생님께서 직접 작사 작곡하시고 부르신 거죠?

 네. 조영남 씨가 좋다고 다시 부른 덕에 그나마 아는 사람은 아는 것 같아요.

 아. 저는 이 목소리를 흉내 낼 수가 없어요. 분위기가 완전히 ‘밥 딜런’이죠. 밥 딜런도 시를 잘 썼죠.

 목소리가 뭐가 좋아요. 조영남 씨가 부른 모란동백이랑 비교하면 다 들통 나요.(웃음)

 제가 엉터리예요.

 그냥 흥얼흥얼 한 것뿐이에요. (마침 <청솔 그늘에 앉아> 곡이 흐른다) 이 곡에는 제 목소리가 너무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카페 단골이던 음대 여학생한테 불러달라고 부탁해서 녹음 한 거예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1987년에 이장호가 영화로 만들었어요. 그때 소설 중에 나오는 시로 지은 시 <빈 들판>도 영화에 만들어서 넣고 그랬죠.

 온갖 걸 다하시네요. 재주를 타고나셨어요.

 그렇게 된 건 사실 문학계 사정이 너무 힘들어진 탓도 있어요. 영화 칼럼도 원고료가 낮아도 시키니까 한 것뿐이고, 노래도 그런 거죠. 나는 재주도 없어요. 재주라는 것을 안 믿을 뿐더러. 그저 도배장이처럼 도배해달라는 곳에 도배해주는 것뿐이죠.

 그럼 도배해주시다가 동인상 타고, 대통령상 타고 그런 건가요?(웃음)

 사실 한 우물을 파고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현실이 뭘 해도 먹고살 수 없는 판이 되어버리고, 또 내가 진행하는 작업들은 현대적인 취향이 아니라서 안 좋아하니….

 안타까운 우리 현실이죠.
(드디어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 나오고 조용히 음악 감상)

 부끄럽네요. 가끔 보면 노래방이나 인터넷에도 있긴 하던데.

 우리나라는 분별력이 없어서, 이런 노래를 부르면 가수가 아닌 줄 알아요. 그러니 우리나라 중년층들이 들을만한 노래가 없어요. 태진아 정도나 들을까. 제가 근사하고 큰 무대에서 이 선생님을 소개할게요.(웃음)

 저 같은 사람이 그런데 나가서 뭐합니까.

조 이게 진짜 노래죠. 내가 아는 노래가사 중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김수영 씨가 쓴 <지금>이라는 가사였어요. 그게 내 생애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이제하 선생의 <모란 동백>이 등장했어요. 세 번째가 ‘화개장터’고.(웃음) 제가 몇 년 전에 임권택 감독을 인터뷰 하는데, ‘취화선’을 찍는 현장으로 새벽 7시에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날 그 새벽에 정일성, 이태원 씨가 안개낀 산에서 <모란 동백>을 부르고 있었어요. 그 때 전율을 느껴서 단숨에 배웠죠. 날 울린 노래는 <향수>와 <모란 동백>인데, 정말 완벽하다고 생각해요.

 다음은 조영남 씨 곡을 들어요.
(조영남의 <모란 동백>이 나온다)

 이 곡 반주해 준 사람이 김명곤 씨라고 ‘사랑과 평화’에서 건반을 담당했던 분이예요. 이 작업을 마치고 일주일이 채 안돼서 저세상으로 갔어요. <모란 동백>과 나의 인연이 참으로 묘해요.


이제하 
1937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홍익대 조각과와 서양화과를 다녔으나, 연애사건에 휘말려 ‘때려치웠’다. 1953년 시 <청솔 그늘에 앉아>로 학원문학상을 수상(서너 달 동안 펜레터가 끊이지 않는 황금기를 맞았다), 1956년 《새벗》에 동화 <수정구슬>이 당선되었다. 1959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었으며, 196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손>으로 입선했다. 1973년 첫 창작집 《초식》을 발간했고, 《수상》《미술춘추》의 주간을 역임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소녀유자》《광화사》《이제하의 시네마 천국》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두 번의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고 김영태와 이인전을 가졌다. 


조영남
1944년 황해도 남천에서 출생했다. 1962년 한양대 음악대학 성악과를 다녔다(후배 여학생과의 스캔들로 인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뒀다). 1964년 서울대 음대에 입학(1967년부터 시작한 가수활동으로 인해 자동 중퇴)했다. 1973년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한국화랑), 1978년 미국에서 두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활발한 전시활동을 시작, 십 수회가 넘는 기획 초대전을 가졌다. 1996년 한국방송대상 가수상을 수상했고, 저서로 《예수의 샅바를 잡다》《태극기는 바람에 펄럭인다》《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놀멘 놀멘》《조영남씬 천재예요!》등이 있다.

댓글주소
써니 2012-10-21 (일) 13:58

그의 삶 그의 꿈 |영원한 나그네 소설가 이제하

소설 속의 그림으로 지우는 ‘줄기찬 외로움’


소설가 이제하. 

외로운 분이다. 

외로움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 분이다.

외로움을 견디는 힘으로 노트북에다 외로움을 새겨 넣는 분이다.

그림의 밖에 소설이 있는 것인지, 그림 안에 소설이 있는 것인지 알 길 없다. 

하지만 소설가라 불리고 싶은 분.

제가 보기엔 당신의 생이 소설적이었어요.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길에 대한 당신의 자서전이 아니었는지.

당신을 두고 나는 길을 나섭니다. 당신의 노트북에서 사진 몇 장을 빼들고.

두 시간여의 앞뒤 없는 질문들을 모조리 잊어버린 채.

삶과 생의 간극, 

그 머나먼 길



담배 피워요. 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어요. 지금도 남자보다 여자를 만나는 게 더 편해요. 네 살 때인가. 아버지에게 된통 혼난 이후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생겼어요. 내 인생의 커브가 시작된 거지요. 문학도 미술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지만, 어려서부터 글과 그림을 좋아했었지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학원》이라는 잡지에 내가 투고한 글들이 실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학원문학상 대상을 받았어요. 같이 상을 받았던 사람들이 황동규 시인과 마종기 시인 등이었지만 원체 내성적인 데다가 사교성이 없어서 이 사람들과 만나서도 친구로 깊이 사귄 적이 없어요. 

서울 콤플렉스에다 서울 사람들의 특유한 자존심이랄까, 서울내기들이라고 자랑스레 자신을 드러내 놓는 게 나와는 도통 통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어요. 홍대 미대 조소과에 입학했는데, 서울이라는 동네가 나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코드여서 늘 혼자였지요. 문단에서도 그렇고, 마음 나눌 친구가 없었고, 지금도 그래요. 생활인으로서도 그렇지만, 인생이 구겨지며 살아온 아니, 스스로 구기며 살아온 거라고 자가진단 하지요. 

▲ 구름의 초상

▲ 해변의 여인

소설은, 그래요. 내 외로움을 내가 확인하는 작업이었지요. 줄기차게 외로웠으니까 어찌 보면 외롭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외로움이라는 게 외롭지 않은 사람에게나 아주 가끔씩 찾아오는 거지. 소설을 쓴답시고 자기 방관과 생활 방치로 일관했지만, 난 이른바 문단과는 거리가 멀어요. 문단이라는 게 누구와 어울려야 유지되고 힘이 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까. 사생활에 대한 건 얘기할 게 없어요. 사생활은 개인적인 것이라 소설적이지도 못하고, 더구나 그 곡절은 너무도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얘기할 게 못 되지요. 

그런 면에서 내가 아는 소설가 오정희 여사는 참으로 모범적인 삶과 좋은 소설을 써 왔어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인데, 삶인 현실과 허구인 소설을 병행하는 노릇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내게는 오정희 여사가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때가 참 많았지요. 

그림은 얼마 전 다섯 번째 개인전을 했는데, 난 화가로 불리기보다는 소설가로 남기를 원해요. 그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목숨 걸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그림을 하는 이유는 소설 써서 받는 원고료보다는 좀 나으니까. 단발적이고 일회성이고. 아는 이들이 그림 한 점씩 사 주는 게 삶을 버티는 데 도움이 되니까. 측은지심이라 해야 할까. 저 사람은 이렇게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소설도 못 쓸 사람이니까. 

내가 미술 전시회를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들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문학상도 받아 봤고, 소설가로 과분한 대접도 받았지만, 나는 내 삶이 관성적이라는 것에 스스로 동의해요. 가니까 가는 거지. 

▲ 문지하·염성순 2인전에서

내 앞에 놓여 있는 컴퓨터는 사실은 내 유일한 적이에요. 이 나이에 이걸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한 노릇이지요. 동숭동 가게에는 주말에나 한 번 올까 하는 정돈데, 약속이 있어서 오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가 내 자리가 궁금해서 나를 밖에서 확인하려 하는 소박한 나들이지요.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하는 시집에 삽화를 그려주러 가끔 가지만, 그 외에는 출판사 발길을 전혀 하지 않아요. 

난 태생적으로 누구와 어울려서 어깨 끼고 같이 가질 못하는 건지. 작고한 김영태 시인과는 매우 친근한 사이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김영태 시인은 재주가 많은 사람이지만, 뭐랄까, 정서적으로 나와는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이었어요. 무용 좋아하고,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굵은 펜으로 하는 그 특유의 데생은 그 사람만의 개성인데, 선이 주는 느낌이 아니라 거기에서 입체감이 느껴지는 묘한 매력이 있어요. 

▲ 밤의 말과 소녀

지금은 가평에서 칩거하고 있는데, 나는 소설을 청탁받고 쓴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써져야 쓰는 거지, 아이가 숙제하듯 그렇게는 글이 써지지 않아요. 재능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글쓰기는 쓰려고 하는 것보다는 써지는 것을 쓰는 게 더 편해요. 요즘 세간에 널리 알려진 젊은 소설가들은 재능이 뛰어나지만 매체의 힘에 너무 의존하는 것만 같아서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 3년 전 죽은 아내의 유골을 뿌리려 동해안으로 가는 한 남자의 여정을 다룬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나는 아주 유명한 어느 젊은 여성 소설가의 소설은 세 페이지를 못 읽겠어요. 재미가 없어서. 날아가는 거지. 감성만으로, 독자에게. 내 소설은 재미없고, 독자도 많지 않아요. 대학에도 나가 봤는데, 나와는 의식이 전혀 달라요. 시대가 변한 거지. 글쓰기의 방식이 아니라, 가치관이 변한 거지. 문학은 결국 인간에게 구애해야 하는데, 구애의 방식이 달라졌고, 소통의 통로도 달라졌으니까. 

우리 시대라는 말의 환상을 깨는 데 좀 더 주력해야겠어요. 장수 집안이기는 하지만 나는 담배 없이는 못 살아요. 그렇지만 술은 알코올 분해효소가 없는지 한 잔만 마셔도 이기지 못해요. 이 나이에 술까지 마셨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마주앉아서 얘기하지 못할 거예요. 담배도 술도 나쁜 건 나쁜 건데, 인생에서 나쁜 것 다 빼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대체 뭐가 있을까? 내게 그림은 필요고, 소설은 운명 같은 거라 할까. 다시 말하면 그림은 삶이고, 소설은 생인 셈이지요. 거 있잖아요. 목적도 목표도 없는. 그냥 가는 거지요. 애초부터 타인이 없었으니 나도 없었던 셈인가?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한 달에 한두 번쯤 가평에서 서울 올라오는데, 놀러 와요. 어떤 사진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이 컴퓨터에 내 사진과 그림이 있으니, 봐요. 지난번 전시회 때 내 그림 사주신 분을 잘 안다고 했지요? 그림 좀 전해줄래요? 

글_ 최준 기획위원

댓글주소
써니 2012-10-21 (일) 14:11

직접 부른 노래. 개성있죠.






가수 조영남이 부르니  역시 잘 부르죠?

댓글주소
   

총 게시물 404건, 최근 0 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04  72세 할아버지의 쇼핑몰 창업 스토리 6070 04-08 1140
103  워크넷 - 대한민국 모든 일자리 정보 6070 04-08 921
102  실버취업 단시간·기간제 집중… 어떻게 생… 6070 04-08 848
101  구인 구직 취업 창업애 대한 얘기입니다. 6070 04-08 831
100  [더 나은 미래] 은퇴 후 제2의 나눔 인생 이렇… jsib 10-23 1226
99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장학금 2천만원 전달 dmdk 05-01 1146
98  90세 최고령 방송통신대 입학 - "정보 넘쳐나… qkxj 04-30 1535
97  정부지원금 아껴 모은 최고령 위안부 할머니 … vja 04-28 1259
96  [Why] 65세 소녀시대 6070 04-16 1248
95  자원봉사 활동분야 6070 04-08 793
94  자원봉사란 6070 04-08 910
93  봉사 또는 평생교육, 기부 등에 관한 6070 04-08 912
92  베이비붐 세대 70%… 국민연금 한푼도 못 받아 asb 10-23 1229
91  미국의 베이비부머, 그들은 은톼를 어떻게 준… khr 08-10 1223
90  [보험으로 하는 재테크] ② 연금보험 제대로 … sbn 07-30 1323
89  전·월세금 밀려… 국민연금 미리 깨는 노인 … park 05-16 1078
88  시간도 여유도 없는 50대 100세시… 05-11 1317
87  은퇴 자금 7억원 어떻게 운용할까? 이정걸 04-27 1279
86  [당신의 연금은 안녕하십니까?] 은행 개인연… 6070 04-18 847
85  은퇴준비 막막한 당신, 당장 ‘3층 연금’부… 6070 04-17 930
84  변액연금보험 90%가 물가상승률보다 수익률 … 6070 04-17 882
83  기초노령연금 누가 받을수 있나요? (2) 6070 04-08 990
82  기초노령연금 누가 받을수 있나요? (1) 6070 04-08 883
81  노인장기요양보험 등급판정기준 및 절차 (2) 6070 04-08 844
80  노인장기요양보험 등급판정기준 및 절차 (1) 6070 04-08 877
79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설명해 드립니다. 6070 04-08 859
78  기초노령연금 미리 신청하세요 6070 04-08 877
77  생활고에… 펀드 깨는 사회 6070 04-05 944
76  "성생활 덕에…" 60세女 고씨가 달라진 이유는 sung 05-14 1390
75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솔로 중도 04-25 1187
74  노인 울리는 일부 상조업체 주의 경보 6070 04-08 1188
73  유언, 상속분쟁 막는 최선책 6070 04-08 1372
72  행복한 부부일수록 ‘나’ 대신 ‘우리’ 6070 04-08 1108
71  결혼 이혼 재혼 구혼 에 관한 얘기입니다. 6070 04-08 1024
70  노년에 혼자 사는 방법 써니 04-13 814
69  [6075 新중년] [제3부-5] 은퇴後 "여보, 밥줘" 대… 써니 02-12 947
68  은퇴, 피할 수 없다면 5F로 정리하고 즐기자 +1 써니 10-26 677
67  '100세 연금보험' 쏟아진다 써니 05-23 935
66  100세 시대 해결할 기발한 기술 10가지 써니 05-23 910
65  나이 들어서야 늦게 깨닫게 되는 인생 naidul 11-05 735
64  노인고 (老人考) | 지혜로운삶 nigo 11-04 1220
63  50대 은퇴준비 돈보다는 ‘이것’부터 준비해… bmk 10-24 771
62  인생을 100점짜리로 만드는 조건 jdj 10-21 559
61  조미미 최헌 잇단 별세 6070 스타 사망소식 가… nse 10-21 2184
60  모란동백 이제하 +3 ljh 10-21 4719
59  [문화] 사석원의 서울 戀歌 ‘욕망 광장’ 종… ssw 10-21 1056
58  노년 삶의 질 kvv 10-17 628
57  나의 일상생활 지침 myself 10-12 595
56  하버드대학 도서관에 쓰인 글 써니 10-12 754
55  장례도 없이 火葬한 '잔액 3000원' 60대 … njm 07-23 1004
처음  1  2  3  4  5  6  7  8  9  맨끝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