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삼각빤스를 입겠지만 옛날 '도요또미
히데요스'가
일본을 통일하고 나서는 그런 것을 입지 않았다 합디다.
왜
그랬냐?
일본이
수십년인지,
수백년인지
군웅이 활거해서 싸우다가 많은 남성들이 오랜 전투를
거치면서 전장에서 죽었다.
통일이
되고도 살아남은 사무라이나 그 졸개들이 더 이상
으르렁거리면서 싸움을 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칼과
창의 쇠붙이를 녹여서 나라라는 곳에 거대한 부처의
상을 만들었다 합디다.
그러고도
넘쳐나는 군인들은 배운 것이라고는 전투하는 것 밖에
모르는지라 어디다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에라,
조선땅에나
보내서 인간대청소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러다 보니
여자들만 진천으로 깔리게 된 세상이라 부지런히 새로운
인간창조를 서두르게 된 것이다.
첨언하면,이런
마당에 김성일이란 者가 당시의 사정을 바로 보지
못했던가 아니면 반대 당파의 황아무개를 모함해서
"도요도미는
쥐새끼 누깔을 하고 있고 얼굴의 생김새는 원숭이 같은
졸렬한 인간이라서 조선땅을 넘볼 위인이 아니더라고'
선조에게
고해 바쳤다.
그래서
조선은 7년동안
왜군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도요또미가
생각다 못해서 여자들의 등에다 담요를 지고 다니게
하면서 누구든지 여자가 필요한 넘은 즉석에서 자식을
빼내도록 칙령을 내렸다고 하드먼.
급한 세상에
속옷을 베기고 말고 시간을 빼았겨서는 인구증가에
문제가 되는지라,
요즘 말로
삼각빤스까지 입히지를 않았다고 한다.
당시의
일본인들은 氏라는 것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이런
기회에 일본이름 중에는 田(밭
전)字나,
무시기
강변의 江이나 川 (내
천)字나,
산중의
山中이나,
들판에서
일을 본 자식을 무시기 野자를 달게 된 것이다.
조선을
침략하면서 자기네도 조선사람들의 性(성)을
가져야 할 필요에서 나온 것이나 아닌지?
어찌 이런
바깥에서만 일을 보았다고 할 건가 마는,
일일이 다
거론할 처지가 못돼서 그저 몇가지로 예를 들었을
뿐이다.
房中(방중)이란
氏는 혹시 없었는지 까리까리 하구먼.
한국여성들이
이조 말에 젊은 처녀나 늙은 할망구나 젓가슴을 왕창
드러내놓고 다닌 유행이 있었던 것처럼 1600년경(실제로는
1592년)에는
일본에서 그런 풍속이 있었다는 이바구 올시다.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고 나서도 한 35여년동안에
한국땅에 와서 살던 일본여인네들이 이런 모양새로
서대문 밖의 아현동고개에서 오줌이 마려우면 그냥
주저앉아서 궁덩이를 노출했었다고 합디다.
아현동
마루터기에서 장기를 두던 영감태기들이 이런 광경을
보자 하면,
"아니
저, 젓,
저 뇬 하는
짓거리 봐라.
히멀건
궁덩짝 들어내 놓고...
뭐 어쩌고
케싸며 혀를 찾다고 하던데...
진심으로
혀를 내둘렀는지,
아니면
은근히 눈요기를 하면서 괜히 폼이나 잡았는지,
나는 아는
바가 없다.
단지
일본여자들이 주저 앉으면 훌러덩 속알몸의 아렛도리
부분이 바로 노출되는 그런 편리한 옷들을 입고 다녔다는
것 정도 밖에는...
하긴,
한국 아줌마들의
고쟁이라는 것은 어떠했었는고...? 일본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봐야 하겠지.
아래가 짜악
터저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다른 것이
좀 있다면 조선의 것은 겹겹이 몇겹을 둘렀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조선의
남정네가 일본녀석들 보다 약간 더 시간을 요했는지
말았는지 궁금하시겠지만,
그 짓하는
데에는 우리 조상들이 매우 실용적으로 살았던 모양이었다.
요즘 세상에
비하면 말이다.
禪涅槃
2014-11-24
12:5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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