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시는대로 미켈란제로는 일곱 교황을 섬겼지요.
이 중에서 미켈란제로의 일수불퇴 작품에 편들어 준 교황이 율리오(Julius) 2세.
한 번은 1541년 만성제(할로인데이)에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fresco 벽화)의 개막식에 천장과 벽의 그림을 보고는 거기에 평소에 미켈란제로를 짜증나게 만들던 교황청 의전장관 비아지오(Biagio da Cesena) 자신의 얼굴이 지옥에서 악마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욕적인 장면이 그려져 있기에 교황에게 고쳐야겠다고 요청했고, 베네치아 포르노 작가 피에트로 아레티노(Pietro Aretino)는 거인족 옆에서 자기가 야만인으로 그려진 걸 보고 교회 그림이 아니라 창녀소굴이라고 항의하자 교황 바오로(Paul) 3세가 '하느님은 나에게 천국과 땅에 대한 권능을 주셨기에 나의 칙서(writ. 문서)는 지옥에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장관은 지그시 참으시요'라고.
이 바오로 3세의 명에 의해 시스틴 성당(Sistine Chapel) 천정에 위를 쳐다보며 그림을 그린 3년 째에 고개를 한 동안 앞으로 내려 숙일 수가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지옥의 왕 미노스의 얼굴은 바오로 3세의 얼굴.
예수 오른 편에는 마리아, 뒤에는 주피터.
그의 작품을 나무라는 사람 중에 '사람들은 속기를 좋아한다'고 말한 카라파 추기경(Cardinal Carafa).- Populus vult decipi.- The people like to be deceived.
그 미켈란제로는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할 때 전진ㆍ후퇴할 수 있는 고양이 자세(묘보세猫步勢)를 취하며 돌 팔매질하는 띠(David sling)를 왼 쪽 어깨에서 등으로 넘겨 오른 편 엉덩이에 붙여진 찰라에 왼 발을 약간 들어 올린 수비자세의 17피트 대리석상(像)을 조각하면서 다윗의 가랭이가 자연적으로 벌어지게 되고 구약의 율법대로 할례되지 않고 포경된 잠지로 고스란히 표현했습니다(1501~1504).
다윗의 가랭이가 벌려지게 된 까닭은 조각하다보니 대리석 아래에 혼유된 이물질, 진흙을 쪼아내버리며 생겨진 공간.
이 원석(原石)은 아버님의 Settignano 채석장 대리석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미켈란제로가 돌을 고를 때에는 거리가 멀지만 Carrara 채석장에 나아가 원석을 고르고 대리석을 자르는 인부(marble-hewer)를 감독하며 그가 조각하려고 만든 '까마귀부리 끌칼(오훼착도烏喙錯刀)'로 대리석의 얼룩진 반흔(斑痕)을 쪼아봅니다.
그가 1503~1506년에 성(聖) 마태오(St. Mattew)를 조각할 때에 무릎 부위에 썩은 돌이 있섰고, 1530~1534년의 '묶여온 노예'를 조각할 때에도 같은 이유때문에 노예의 표정이 마치 나자로가 지옥에서 몸부림치는 표현이 되었지요.
그 햇수로 4년 걸린 다윗 상.
처음 1년이 지나자 추기경이 와서 보더니 '아- 다 끝나가는 군!'
또 몇 달이 지나도 3년이 지나도 여전히 다듬고 있섰고 조각을 마감한 마지막 해에 그 추기경이 다시 와 보더니 '다윗의 코가 좀 높다'라기에 미켈란제로가 대리석 쪼각을 왼 손에 쥐고 올라 그 오훼착도로 쪼으며 부스러기를 떨어뜨린 후에 '자- 이제 좀 됐읍니까'라고 묻자 추기경이 쳐다보더니 ''아- 이제는 됐네'라더랍니다.
몬시뇰 세르니니(Sernini) 역시.
성인, 성녀, 다윗의 잠지를 그리고 조각하는 화풍을 불경스럽게도 이탈리아로 가져왔다고.
그래서 언젠가 조각한 예수님 상(像)의 팔, 다리를 부셔버렸읍니다.
그러나 미켈란제로가 죽고 나서 7년만에 바사리스(Vasalis, Georgio)가 미켈란제로를 '열정적, 활기 찬(Vite)' 예술가라고 평합니다.
미켈란제로의 좌우명은 시편 51편 1장:
"오 하나님, 당신의 사랑의 친절에 따라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당신의 자비에 따라 저의 범법행위를 지워주십시요."
시무엘 상 17장 43절:
골리앗이 다윗에게 "내가 개냐?"
미켈란제로는 '눈 먼 나의 믿음은 먹을꺼리 보따리를 오른 팔목에 걸고 개에게 인도되어 끌려가는 모습'이라고.
우리나라에 다듬은 돌 17만 5,500개로 화성을 축조했읍니다.
정조가 어굴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위상(位相. 위격)을 올리고자 지은 성곽.-유네스코가 지정한 수원 팔달산 아래의 문화재.
그 때에 쓰인 석재가 숙지산 돌 8만 1,100개-강하고 결이 곱고, 여기산 돌 6만 2,400개-부드러우면서 결이 거칠고, 권동 돌 3만 2,000개-여기산 것같으면서 조금 더 곱고, 팔달산 돌 1만 3,900개-숙지산 돌보다 결이 곱고 여기산 것보다 거칠다.
그런데 실재 들어간 자재는 석재 20만 1,400개, 기와 53만장, 벽돌 69만 5천장, 목재 2만 2,600주.
이 화성을 축조하려고 명석한 정조임금은 물론 많은 지도자가 출동했는데 그 중에 설계, 저렴한 공법, 감리한 분이 다산 정약용.
그가 규장각 편찬사업, 형조참의를 지냈지만 가톨릭교도라고 출척당해 귀양살이를 하며 죽은 후에도 복권되는 시호를 추증받지 못하고 가콜릭에서도 평신도 자격을 찾지 못한, 그러나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복음전래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다고 기록되었고 다블뤼(Daveluy)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술에 좋은 자료가 되었음이 기록됩니다.
그가 죽을 때(1836년)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중국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하였다고 한국가톨릭대사전은 기록하면서도 한심하게 고루한 한국가톨릭사회는 그의 세례명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그늘진 배교, 자명소(自明疏), 척사방략(斥邪方略)에 중점을 두고 있지요.
그 분이 500여만자, 503권 182책을 저술하고 필자가 추리하면 빈혈에 의한 뇌일혈[중풍-좌반신 마비 혈허생풍좌탄(血虛生風左癱)]로 돌아가십니다.
그 한 번이라도 배교하면 교인이 떡을 받아먹거나 줄 수 없고 사제가 될 수 없다는 엄격완벽주의 도나투스(Donatismus)파(派)가 오히려 이단으로 몰리고 죽음에 임박하여 받는 종부성사(終傅聖事 Sacrament of Extreme Unction, Extrema Unctio) 때의 귀의(歸依)가 매우 중요하다는 교리가 통용된지 1,900년이 지났는데도 말씀입니다.
그 유방제(劉方濟) 중국신부의 본명[영세명]이 '파치피코(Pacifico)'가 아니고 프란체스코 퍼난데즈 카필라스(Francesco Fernandez Capillas)인 줄도 모르는 한국 가톨릭.
'내 믿음은 개를 따라가는 눈 먼자. 유교로 살고 예수믿음으로 죽다.'- 정치계와 종교계에서 개 밥의 도토리 다산 정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