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짜리가 울다가 오줌에 저린 바지를 엄마가 벗겨주자 아랫도리가 시원해져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자 이 꼬마의 봉알을 보고는 동네 꼬마들이 웃읍다고 킥킥거리자 이 애도 좋다고 덩달아 웃었습니다.
이 꼬마가 순진한 때에 뭔지도 모른 멋 모른 연극이었지요.
그러나 아이가 커가면서 이기적으로 남을 다스리려는 언행이 자기의 수명을 줄여줍니다.
남보다 더 앞서려는 술수와 남을 다스리려는 지저분한 생각이 상대 편 가슴에 상처를 주면서 그 쪽 감정을 유발합니다.
정치는 쇼라는데 정치에 관심없는 사람이 거의 없지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니까요.
적을 만드는 정치는 연극이라듯 신사적인 게임을 원하지 않고 부귀공명을 향하여 우정이란 털끝만큼도 없이 오월동주 정당에 소속되어 뜬 구름처럼 이합집산합니다.
그러므로 정치에 관여하지 말거나 곽외(郭隗)처럼 악의(樂毅)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뒤에서 관망하고 있서야 오래 삽니다.
줄리어스 시저 역시 앞장 서서 폼페이 공화정을 해체하려 하다 반대파에게 죽임을 받았지요.
세상에 진정한 친구란 드뭅니다.
그 드문 중에 '관중ㆍ포숙', '소진ㆍ장의'를 들먹였서도 포숙은 관중의 친구지만 관중은 포숙의 친구가 아니고, 장의는 소진의 친구였지만 소진은 장의의 친구랄 수가 없겠습니다.
관중은 뭐든지 포숙보다 많이 거머쥐려 했고, 장의는 소진의 합종론(合從論)이 무너지고 무안군(武安君) 소진이 도피한 연후에 자신의 연형론 정략을 펼쳐나간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전에 소진이 취직하러 나갔다가 욕만 먹고 돌아 오자 아내는 베틀에서 내려오지 않고 형수는 밥을 지어주지 않다가 6국의 재상이 되어 집에 돌아오자 형제, 아내, 제수가 그를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엎드려 밥을 먹기에 그가 하는 말이 '낙양에 내 땅이 2경(頃. 사방 백발자국 100畝무=1경)만 있섰던들 내가 어찌 6국 재상의 직인을 찼겠나'라며 돈 때문에 출세한다고.
이 말을 듣고 그와 동문수학하던 장의는 초(楚)나라에서 거절당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성을 내자 '내 혀를 보라.아직도 있는냐, 없느냐'라면서 소진을 찾아갔더니 소진이 힘들다면서 관직을 주지 않고 그에게 자기가 적대국으로 삼은 진(秦)나라에 가보라고 격려했습니다.
이로 보아 세상에는 부요하고 관대한 친구가 거의 없다는 뜻.
'하늘에 태양은 둘이 없고 정권에 둘이 다스릴 자리가 없다'고.
그 스토아 철학에 심취한 키케로가 친구 아티스(Attice)와 주고 받은 '우정론(De Amicitia)' 편지에서 그들의 친구인 소(小) 스키피오 장군이 칼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로마가 혼란에 빠지자 여론을 무마하려고 대속되어 카토에게 죽임을 받은 것이지 농업개혁 연설하다가 죽은 것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카토는 자수성가한 키케로와 달리 정치권에 줄 타는 권도를 잘 알고 군중심리를 잘 아는 웅변가.
그가 풍기단속 감찰관으로 선출된 것도 선동가였기 때문.
그의 슬로간은 그리스문명을 로마에 접목시키는 문화정책 반대, '칼타고를 진멸시켜야 로마가 산다'는 군사정책.- "Delenda est Carthago.-Carthage must be destroyed"이란 말로 매번 원로원에서의 연설을 끝냄.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칼타고와 3차대결의 118년 전쟁에서 한 해 더 걸려 칼타고를 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의 선정(善政)에 향수를 느낀 많은 주민들이 불만을 터뜨리자 파비우스(Fabius) 장군 못지 않게 칼타고 사람을 '배반자'로 낙인 찍고 로마시민을 진무하기 위해 문사공격단을 대동한 그의 웅변술로 시민을 호도하며 많은 군장성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한 편 그 아티스(Attice. Titus Pomponius:109-32 BC).
부요하나 정치야망을 펴지 않고 뒷날 폼페이와 그 시저의 권력 싸움에서 아테네에 은거해 있섰기에 '지성인 아티쿠수'(Atticus)란 별명이 붙음.
아티스는 '좋은 친구는 품성이 원래 착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울하지 않음이 인생의 최고의 목표라는 스토아 철학의 키케로와 달리 자신과 상대에게 쾌락을 주는 그 처세관이 행복에 이르는 최대의 선(善)이라는 에피큐리안(Epicureans. 쾌락주의 원조 Epicurus;341-207 BC)입니다.
여담이지만 그 후 아테네에서 스토아 철학자들과 에피큐리안을 만난 사도 바울이 그들로 부터 '떠벌이(babbler)'란 말을 듣습니다(사도행전 17:18).
우상들로 가득찬 아테네의 그들을 보고 바울의 속의 영이 격분하였지만 바울 역시 그리스 철학자 프라톤의 기본7덕목을 환골탈퇴하여 고린도 전서 13장에 옮겨 놓은 분입니다. 그 건 이렇다 치고 ㆍㆍㆍ,
그 키케로는 '우정이란 인간만의 고유한 특권으로서 신(神)이 그 소유권을 쥐고 있으며 덕스러운 영혼끼리 만나야만 우정을 가질 수 있으며 우정의 잇점을 나눌 수 있다'고.
이에 소(小) 스키피오는 우정이 깨어지는 이유는 취미 성향이 바뀌거나, 멀리 떨어져 서로 못 보거나, 호의를 바라지 말아야 하는데 사랑, 돈애 대한 요구 아니면 정치에 대한 의견이 달라져간 이유때문이라고 말했섰지요.
이에 키케로는 친구가 되려면 자신의 가치만큼 같은 느낌, 나를 사랑하는 만큼 친구를 사랑해주며 너무 냉정하지도 말고 타산적이 아니기에 서로 만나면 즐겁고 고무적이어야 할 꺼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부요하고 권력이 있서도 친구를 사랑해주고 친구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면 독선자라고.
키케로는 극작가 테렌스, 법률가 라엘리우스(G. Laellius sapience), 라엘리우스의 사위 G. 파니우스(Fannius)와 더불어 우정어린 '소(小) 스키피오 동호인' 멤버였지요.
그 파니우스가 오래 사귄 친구가 더 좋은지 새로운 친구가 좋은지를 물어 보자 키케로는 새 친구를 인정해야 한다고.
그 카토(Cato)의 꺽이지 않는 고답적 횡포는 대(大) 스키피오 휘하에서 형사재판관으로 임명되어 제 2~3차 포에니 전쟁에 가담했다가 상관 대(大) 스키피오가 죽자마자 '이 때다'라고 일벌백계주의로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그리스 문명 부흥주의자인 소(小) 스키피오를 암살, 글라브리오, Q. 미니키우스 테르무스를 축출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일곱살 많은 친구 아티스의 말을 따라 법조인 키케로가 정치계에서 발을 떼어야 오래 살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키케로는 설흔 일곱살 때에 법조계를 떠나 정치계에 투신하여 로마의 공공건물ㆍ도로ㆍ공중위생을 담당하는 조영관(造營官. aedile)으로 첫 발을 내딛으며 승승장구하지만 세금을 많이 거두어드릴 옥토(玉土)인 골(Gaul)을 로마에 합병시키며 대세를 몰아 쥔 줄리어스 시저의 쿠데타를 막지 못했고 시저의 양자 브루투스를 포함한 원로의원 일당에게 황제가 되려는 시저가 암살된 후 로마를 예전처럼 복구하려고 국민정부를 수립하려고 재차 시도했다가 그가 격렬히 비난했던 제 2삼두정치 안토니를 비롯하여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 세력을 막아내지 못하고 안토니가 작성한 '권리박탈자 명단'에 들어가 죽고 말았지요.
그 당시에 실직자들과 농토를 달라는 농민들이 로마로 몰려와 폭동을 일으킨 시절이기에 키케로는 국민에 의한 민주정부를 복구하려 했지만 친구 아티스보다 18년 덜 살았던거지요.
이른 바,
관대하면 원수질 일도 없고(관이무적寬而無敵)
아는 걸 우기지 않고 참으면 걱정이 없고(인지무우忍知無憂)
싸우지 않으면 질 일도 없읍니다(부쟁부졸不爭不拙)라듯이요.
'스코피오'가 많기도 해서 꽁지 덧말:
Lucius Cornelius Scipio Barbatus(활동기 304-280 BC). 제 1차 포에니 전쟁 참여.
Gnaeus Cornelius Scipio Asiana(활동기 260-254 BC). 제 1차 포에니전쟁 참전.
Quintus Fabius Maximus Vercosus(코에 큰 사마귀기 있기에)(c. 266-203 BC). 로마의 숙적 칼타고 한니발(247-183 BC)과 제 2차 포에니 전쟁(Punic war)을 수행다가 한니발 기병대에 백전백패하기에 정면 대결하지 않고 지연작전. 그래서 '지연'(cunctator, the Delayer)이 별명.
Lucius Cornelius Scipio Asiaticus(소아시아 정복자. 활동기 207-184 BC). 제 1차 포에니 전쟁(264-244 BC) 전반전에 참전.
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아프리카를 정벌했다고) Major(236-184 BC).
Marcus Porcius Censorinus(감찰관) Cato Major, Cato the Elder
(235-149 BC). 위에 말씀 올린대로 제 2차, 3차 포에니 전쟁 참전.
Scipio Calvus. 제 2차 포에니 전반전 참전했다가 전사(211 BC).
Publius Terenticus Afer(c. 190-159 BC). 칼타고 출신으로 포로로 로마에 끌려와 원로원의 노예로 팔림. 극작가. 여담이지만 "행운은 용감한 자에게!", '먼저 온 자가 먼저' 또는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쪼아먹는다.'-'Potior est, qui prior est'란 말을 한 문인이지요.
Scipio Aemilianus Africa minor(184-129 BC). 본문에 나오는 소(小) 스코피오 장군.
포에니 전쟁(the Punic War)(264-146 BC).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118년간 전쟁.
1차전(264-241 BC), 2차전(219-202 BC), 3차전(149-146 BC)
후기:착한 한니발. 학자, 전략가, 정치가
한니발(Hannibal Barca:247-183 BC). 칼타고 출생. 부친을 따라 스페인에서 양육되고 아버지를 따라 다시 칼타고로 되돌아가 교육을 받음.
그가 제 2차 포에니전쟁 참전 이후 로마군대에 백전백승, 로마에 바짝 다가갑니다(211 BC).
BC 190년 이후 말년의 그가 로마 유다무스(Eudamus of Rhodes), 레길루스(Regilus, L. Aemilus) 부대에 패주하여 크레테 섬을 거쳐 터키로 후퇴하여 서진하여 그리스를 거쳐 로마를 재침공하려 했지만 (사도행전 16:7 사도바울, 베드로 전서 1:1에 기록된) 비티니아(Bithynia)에 진을 치고 '자 우리가 그 오랜 긴장 속의 로마군을 풀어주자. 까닭은 그들이 생각하기를 이 늙은이의 죽음을 너무 오래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라는 마지막으로 착한 말을 하고 약을 먹고 자살합니다.
그는 다국적 군사를 통솔하려면 사령관이 그 다국적 언어를 숙지해야만 연합군을 통솔할 수 있다는 전술을 로마군에게 아르쳐 준 셈이라지요.
그가 점령한 로마 영토에서 그의 착한 정치가 자못 훌륭하여 주민들로 부터 호응을 받았기에 칼타고가 망하자 로마 독재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난 것이지 칼타지 사람들을 '배반자'로 낙인찍는 것은 역사가들의 잘못이라고 H. E. Gould가 지적합니다.
오늘도 안녕히, 웃음이 가득하시기를! dkp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