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증거로서 데칼트(1596-1650. 54세졸)는 할 말 다하고도 32세 더 많은 갈릴레오(1564-1642. 78세졸)처럼 파문당하지 않았기 때문.
데칼트가 54세 밖에 못 산 이유는 감기 걸려서 입니다.
6살에 재위에 오른 후 23살된 영(嬰) 처녀 스위든 크리스티나 여왕이 그녀의 섭정 옥선쉐어너(Oxenstjerna) 총리가 중매를 해도 시집을 안 가다가 데칼트 철학에 흥미를 느끼고 초청받아 그 곳에 간 53세 된 데칼트가 일주일에 3번, 추운 날에 아침 5시부터 강의하다가 급성폐렴에 걸려 죽은 까닭이었지요.
아버지 같은 늙은이를 누가 애인 삼을까요?
그 20줄 처녀는 스위든의 새벽 바람이 시원하다고 하겠지만 철학, 수학이나 하던 데칼트가 논쟁에 휘말릴 정도로 신학까지 파고들었으니 50줄에 북구 스칸디나비아 찬 바람에 그의 건강이 견딜 수가 없섰겠지요.
그러니까 30살 아래에 애를 낳아보지도 않은 빠리빠리한 젊은 애를 상대하면 절대 안된다고 그러더구만 철학자가 이 뻔한 상식을 몰랐다니까. ㅎ 이건 이렇다 치고 ㆍㆍㆍ
그 당시에 교리적으로 인간답지 않아 파문을 당했다면 파문당한 자를 어느 누가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기에 파문당한 후 마틴 루터 역시 숨어 살아야 되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러한 시절에 그는 신의 '존재론'에 역설적으로 말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 개념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진리에 가까워진다'로 번역해야 더 적확할 것입니다.
까닭은
cogito. 자동사. 신중히 고려하다,↔ excogito, 생각하다, 고안하다,
ergo. 부사. 그러므로, 그러니까, 이어서.
그런데 'sum'이라는 단어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sum. 자동사. 있다, 존재한다, ~에 속한다, ~에 가치가 있다, '~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 '진리로부터 멀지 않다'라는 뜻이기 때문.
역설이란 '눈에는 눈, 이(齒)에는 이'란 율법과 반대로 '누가 날 때리면 다른 쪽 뺨을 들이대라'란 예수님 말씀, '사람은 한번 죽는다(히브리서 9:27)'에 대하여 '사람은 다시 태어난다(무량수경 상권)'라며 반대로 뒤집은 설법이 언뜻 보기에는 진리에 어긋나는 것 같지만 그 논리 속에 오히려 일종의 진리를 내포하기에 억설(臆說 assumption, hypothesis)과는 다릅니다.
데칼트의 그 개념은 21가지의 사고방식 중에서 12번 째 규칙.
데칼트의 교회 신분은 신부와 주교 사이 '몬시뇰' 직분.
그가 유심론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나는 존재한다. 고로 하느님도 계신다'라고 풀이하면서 이는 '나는 안다. 고로 내 몸과 다른 마음을 갖는다'로 재해석하면서 '내가 실수 없이 하느님이 계시다고 결론 지을 수 있지만 하느님이 존재하시기에 내가 역시 존재한다는 이유를 댈 수 없다'라고 연역해 나갔습니다.
이에 대하여 반론이 쏟아져 나오자 그는 신학자들이 그 잘 알 수 없는 수학, 해석기하학적으로 도면을 섞어가면서 답을 해 나가면서 더 어렵게 상대편이 알아들을 수 없도록 몰고 나갑니다.
그 때 이의(objection)를 제기한 Alkmaar의 Caterus 사제단, 두 번째 논사(論師)로 프랑스 Mersenne 신부로부터, 세 번째 영국 Hobbs(a Celebrated English Philosopher)로부터, 네 번째로 신학박사 M. Arnauld로부터, 대여섯 번째로 종교철학연구단(Divers Theologians and Philosophers) M. Gassendi, M. Cler- selier로부터, 일곱 번째로 프랑스 예수회 Bourdin Dinet 신부에게 '인간이 무엇인가? '몸이란 무엇?, '영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소견을 회답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하는 소재(素材)는 몸으로 하는 말, 개, 소크라테스, 플라톤 적인 생각으로부터 영혼에 의한 하느님, 천사를 대상으로 나뉘어진다고 도표를 만들어 일일히 회답합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두 뽐내지만 까마귀 암수를 구별*하기 어려운 것 처럼 우리가 까마귀 모양의 생각을 해야만 남들로부터 집중적 공격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왈여성(具曰如聖), [시비선악(是非善惡)], 수지오지자웅(誰知烏之雌雄).- 시경 소아(小雅) 절남산지십(節南山之什) 정월(正月)
'그리 하여야만 그러기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란 넉두리를 안해도 될 것 같습니다.─ 'Hinc amor est illae lacrimae.'
'눈물의 씨앗은 사랑', 즉 연인 앞에서 울기만 하면 됩니다.─
'Lacrima est amorum._ Love consists of tears.'
왜냐하면 그 역설(逆說. paradox. par, 비슷, 적합한, + edox, 가르친다, 자세히 보여준다, 완전히 아르쳐 준다)은 우리와는 반대 편 처지의 생각과 비슷(similia, aequalitas)하게 생각해 보는 공평성, 공변성, 보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파라독스(paradox)를 'para, 둘째 + doctrina 가르침'으로 해석하는 건 잘못일 겁니다.
'doctus,-a,-um(경험된, 문화적, 기교적)'이란 단어가 있는가 하면, 'edoctus, edoceo, edocui, 가르치다, 자세히 알리다'라는 동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역설이 억설로 다루어지지 않으려면 데칼트 정도의 과학, 수학을 접목시켜야 좋을 성 싶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즐겁게 보내시기를! dkp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