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하니 마음고민이 된다는 그 마음을 가져오라는데 가져 오지 못하는 제자가 달마선사의 승통을 이어 받습니다.
그 마음이 불가의 제석천(주피터象)이 오고 간다는 수미산을 찾아가도 없섰답니다.
마음을 비우려해도 마음이 보여야 버리고, 마음을 버리고 좋은 말씀으로 채우려 해도 마음 그릇이 보이질 않는 걸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비우는 그 해탈의 경지인 절대세계에 들어가는 길목에 6개의 푯말이 세워져 있는데,
첫째는 주는 것
둘째는 지키는 것
셋째는 참는 것
넷째는 꾸준함
다섯째는 마음이 없음을 묵상하는 것, 그리고 나서 최후 단계인 그
여섯째는 이 걸 아는 꾀(슬기)였습니다.
그 중에서 지킴, 묵상 그리고 꾀를 삼학(三學)이라 하여 부처님의 교리를 집약한 거라 하는군요.
그러므로 청정적멸(淸淨寂滅)이란
'허망함이 없는 꾀'라고 신회대사님이,
'마음 바탕에 어리석음이 없음이 스스로 깨달은 꾀'라고 육조대사님이,
'알게 모르게 베풀며, 돈 안들지라도 남을 착하게 대해주는 말 한 마디 보시가 꾀'라며 신수대사님이, ..
그러므로 자기의 것, 자기 집, 자기가 쓴 글이라고 함부로 불태워버리는 건 본심이 아니라, 남의 마음을 상처내며 살아 오면서 잘못 길들여진 겁니다.
까닭은 불난 집은 세상이요, 장난감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동정심인 수단이기에 없애버리는 행위자로 인하여 이 세상은 병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산대사께서는
"그 경계하고 지키는 계(戒)란 마치 도둑을 붙잡는 것이요,
묵상이란 말은 도둑을 얽어 묶는 것과 같고,
그 꾀, 지혜라 함은 도둑을 죽여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시다.-전도 2:13
그러자 그 후에 맹자의 논객 고자(告子)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우리 이전의 우리 어렸을 적에 자연그대로 하얀 종이가 본성이었고,
어질고 의롭다함은 인간의 말로 후천적 지어진 마음, 작위적으로 만든 윤리도덕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갓난애가 천진난만한 것은 윤리와 공포로부터 무식해서이지, 알고도 착한 것이 아니라는 논리지요.
그 고자는 성선설을 부르짖는 맹자에게 '연못에 고여 빙그르 도는 물에게 어느 방향으로 물꼬만 터 놓아준다면 그 길로 흘러내리는 것 처럼, 인간의 본성은 의지로 마음 먹지 않는 한 선의 방향으로 갈지, 악의 방향으로 갈지 모르기에 선악의 두 가지 마음이 함께 있는 까닭이기에 인성의 개념에 대해 백지설'을 주장한 겁니다.
그러자 맹자는 물은 외세에 의해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지만 물은 원래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있는 게 본성이라고 논박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본성이란 억지로 남을 올라타는 게 아니고,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하는 법칙, 즉 중력에 응하는 법칙에 순종하는 윤리가 자연스럽다는 겁니다.
비록 맹자는 인간의 본심이 착하다는 설명을 결코 못했지만서도.
그러므로 인간은 좋은 교육환경에서 자라야 한다는 순황(순자)의 '삼밭에서 꼿꼿히 자란 쑥'의 예화처럼 맹자의 어머님이 책이 가장 많이 있는 삼촌 집으로 맹자를 보내고, 세 번 이사 다닌 걸 보면 알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