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다음 내용을 졸저 '역설적 진리' 4~7頁에서 송구스럽게 뽑아 옵니다. 내가 봐도 아주 유식한 척 하네, 젠장할 넘.
'세상을 원망하지마라, 이웃을 사랑하라. 옳거니. 그리하여 세상을 관조하는 입문(入門)이요 착함과 악함사이의 문지방을 딛고 서 보는 순간'을 재해석한다니 dkp가 과연 헛소리하는구나.
가치는 이념적이며 순수한 존재당위. 따라서 의욕이 주관하는 행동당위와는 다르다.
존재당위에 대해서 말크스 쉐라, Der Formalismus in Der Ethik und Die Materiale Wertethik, 237頁에서 후학이 연구하시라. vedok
말크스 쉐라는 여기에 정(正 테제, thesis), 반(反 테제, antithesis)의 대조법을 인용한다. 즉, 이념과 실재계의 양계면(兩界面)에 긴장관계가 있고 실재계가 대립저항하여 현실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둔다고 말한다(158頁).
이것을 대우(對偶, 짝, a pair, opposition, antithesis, 수학적으로 contrapositive proposition)라 정의했고 마치 널뛰기할 때 한 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이 내려가는 현상과 같으며 이 양계면의 경계선을 '알키메데스 점(点), 지렛목이라 말했지요(160頁).
이 경계면에는 한 두가지의 마찰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며, 이 복잡한 마찰면을 해석하기 위해 가치면에 착함, 고귀함, 풍성, 순결의 윤리에 기준을 두고 환기시켜주신 분들이 소위 성인이란 점이다.
진리라고도 불리우는 이 윤리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십계명, 율법, 불교의 율장, ..사법부의 금과옥조인 육법전서, ..500법전서,..
그러나 죄짓는 가지수보다는 항상 적어 항상 벌칙과 금지조항, 시행세칙을 더 제정하고 있는 중. 그러므로 어느 새도 무성한 나뭇잎을 건들지 않고 그 나무 속으로 날아 기어들어갈 수 없서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말일께다.
그래서 이사야서를 인용한 바울은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라 갈파했으리라.
하! 그래서 "야 이놈 봐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조져!" '눈에는 눈, 이에는 이(齒)'(출애 21:24), 레위 24:20)에 대해 율법의 근본에는 자비가 깔려있음을 성현들은 계속 계몽해오셨다.
하! 요것 봐라. 선악을 재는 잣쪽을 성현만 가지고 있다더냐? 그 실재계와 이념계의 마찰면을 규정하는 잣쪽을 사람마다 가지고 있도다.
내가 촬수님하고 시소를 탈 때 촬수님의 허리 아래가 두꺼워 그 살집막대?때문에 제가 공중으로 띠워지자 그에게 조금 앞으로 닥아 앉아달라고 1. 말했다, 2. 요구했다, 3. 간청했다, 4. 충고했다. 여기서 '어'가 다르고 '아'가 달라 인생이 바꿔진다.
상도덕이든, 돈이면 다야?든 인과율이든, 사필귀정이든, 인과응보든 권선장악이든 양아치 생각과 도덕군자의 처신이든 이 현실과 이상향의 중점인 그 마찰면에 살프시 앉는 태도를 중용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중용이란 "네게 해로운 것을 네 이웃에게 행하지마라." 그 나머지 힐렐(Hillel. 탈무드 Shabbat 31 a), 예수님, 부처님, 공맹, 노장자, 마호멧또 그리고 이 열린마당의 대물(大物), ... 강 건너 소물(少物) 고자, 옆집 순자, 학자, 경자, 침상에 올라 죽어나게 안깐 힘 쓰고들 있는 변강쇠, 옹녀, ...춘향이. 몽룡이를 모시는 방자 또한 할만큼 좋은 덕담을 늘어 놓았다만은...
그 말(What is Hateful Unto You, Do Not Do Unto Your Neighbor)을 황금률(The Golden Rule), 이것이야말로 가치의 당위성을 윤리신학(Theologiae Moralis, Moral Theology)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리라.
그러하온데 예수님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적(强敵)이요 천운팔자소관이요 모시되 아버님 섬기듯 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모신 분이 계셨으니 바로 하느님이시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가는 계명이라고 우리에게 일러 주셨다.
스승이요 아버님이요 창조주요 너무 커서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가치의 당위성을 봉헌하고 하느님을 믿으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헐벗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며 당신을 따르라 말씀하신 것.
주님보다 일찌기 석가여래께서 말씀하오신 바 여래께서 입적하신 후 천년동안 이 '부처님 말씀같은 불법'(연상법然像法)이 아니라 생전의 말씀을 담은 공관복음이자 입적하시기 전의 마지막 말씀이온 바, 법구경(法句經. The Dhammapada) 제 423장에
"공시태상으로 침묵의 경지에서 번뇌도 끊고 영적지식이 완전한고로 그가 나타난다면 나는 그를 현인으로, 진정한 사제라고 부르겠노라"고 기다림의 법칙을 운행하셨으니 예수님과 석가여래의 주도권 싸움(축록전逐鹿戰. competition for hegemony)을 말씀하옵는게 아니라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는 겁니다.
하! 웃기지마라! dkp가 또 무식이 발동하여 '공시태상'이라 의역을 했으니 제발 쉽게 좀 말해다오!
그 어느 젠장할 넘이 알아나 주냐 그 왜 두고 많은 말, 그 많은 생선 중에 복어알이냐신다면 그저 꾸벅 고개 떨구고 할 말씀 잊는단 말씀이외다.
공시태상이란 시간, 공간의 일체, 적재적소, 느낀 즉슨 급발진 언행일치. Synchrony. 그리스어 sun, 'together'같이 + 그리스어 khronos 'time'의 합성어를 dkp가 곰곰히, 멍청하게 한자로 번역한 공시태상(共時態相)입니다. 여기에서는 초연히 명상, 선에 함입몰두하여 심신일체 침잠의 득도의 경지를 의미하여 써올린 뜻이옵니다.
짜슥아 어려운 말을 더 어렵게 해석해주는구나. 쉬운 말을 우라지게 못 찾아 숲속을 헤메는도다.
"예 골이 비어서."
이 때 '탁'하는 소리. 돌아다 보니 날이 더워 반딧불이 방으로 들어 왔다가 두꺼운 영한사전 껍대기에 대가리를 부딫친 모양. 발발 떨고 있다. 그렇지 책속엔 빈틈없이 글이 차있고 네 대가리 속은 비었을테니까. 네까짓게 황룡사 솔거 노송에 대구리 깨져 죽은 참새흉내라도? 흐 흥!
아 ─ 세탁기 속에 그저께 꽉 채운 남방셧츠나 돌려야겠다. 온갖 잡상으로 꾸겨진 내 머리통을 세탁해주는 기계는 없나? 있으면 얼릉 사서 빙빙 돌리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