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 건 오징어새끼가 분명한데 별볼 일 '쪼꾸'맣고 흐느적거리면서도 목구멍을 감치면서 넘어가고 아금니로 갈아 씹으면 씹을 수록 오징어 살코기 맛나는 꼴뚜기 쭈꾸미.
그러나 이 '놈'이 시장에 나오는 제 철이 아니고는 항상 맛보는 건 꼴뚜기젓으로만 사시사철 제 '꼴'이요 쭈꾸미는 '아쭈'라고 생각'헌'다.
하도 잘난 척하고, 남을 비꼬기가 꼴같지 않아서다.
마치 흐르는 강물에 떠내려온 통 유목(流木)처럼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예술적 가치있는 오브제 트로베(objet trouve') '꼴'처럼 그 사람 본연의 이미지요 그림자라 표현한다면, 아무 사람이나 사회적 가치가 있는 소품(오브제 다아르objet d'art) '아쭈'라고는 말할 수 없을께다.
항차 내가 이 글을 올리면 어디서 베껴왔느냐고 출처를 밝히라는 꼴같지 않은 선열반이 개밥에 도토리처럼 굴러들어올 것이 분명하기에 이 자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이에 비유할 수 없지만 사람이라면 그 '꼴', '쭈'처럼 "성취감을 맛보게 하는 취하는 시기와 책임감에서 벗어나는 놓는 시기...둘 다 중요하고,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시기를 감지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한다.-정신신경과 우몽은박사.
사람이라면 기름부어진 자기도취에 빠져 언행에 대해 효과를 기대하지 말아야 하겠거늘, 그리하여 기록에 나오기를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란 말씀이 있다.-마태 22:14
그 장마다 '꼴과 아쭈'가 나오지 않는데도 안타깝게도 어디 가나 그 주접떠는 사람이 많아 우리에게 성가시다는 말이다.
이 열린마당에 날만 새면 그 장탉 울음소리를 내지만 그 오직 자기와의 비교지식에 분통터져, 작두로 잘 다듬어 펼친 볏짚글을 박박박박 후벼파보는 내일 죽기 전에 오늘 인심 잃는 짓꺼리나 하고 있으니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 남을 인정하고 어려워하며 내 자신의 글이 오직 검불 꼴감 '추요'라며 '갱'신히 열'링'마당에 깐 지푸라기를 후벼 파 지렁이라도 찾지 못하면, 지푸라기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아르쳐 달라며 힐문하는 녀석.
'고'럼 나는 생각하고 넷 장터에서 사왔다고 말해주면 왜 사왔냐, 정신이 헤까닥하다느니, ..
이러니 그가 경제시론으로 영자의 전성시대였을 적 성취감으로 연장전을 벌리고 있는 남에게 질투심 욕심 많은 놀부의 표상이요 아리바바 형아 카심의 심'뽀'라 아니할 수 없기에, '사부'로 모시다가 욕설이 만건곤하기에 아예 이제는 그의 비아냥대는 잡글에 대해 '안타깝다'라며 반말로 응수한다.
아직도 제 깜양에는 이 열린마당에 입장하여 되나케나 행패해도 무조껀 '꼴쭈'가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니 한심하달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