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하려도 반대할 곳이 없다. 다시 말해 안티가 설 곳이라곤 자비로 출판하거나 지하에 숨어 떠드는 수 밖에 없나 보다. 뭐를?
안티가 보는 "안타까운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그 착한 다미안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제정한 다미안상(1983) 공로부문 수상예정자 소노 아야꼬(증야능자;본명 미우라 지즈꼬. 삼포지수자)가 여류 문학상부문에 상을 받으라고 연락했으나, 기독교인에 의한 수상은 나설 자리가 못 된다고 말하며 상받기를 거부했다.
그녀가 설 곳과 논공행상을 따질 곳은 사회였지 신앙계는 아님이 분명해진 것.
'소노 아야꼬'는 기존문화에 식상한 의외의 인식을 ☞<신의 더러운 손>이란 제목으로 펴냈는데,
그녀는
도대체 그 신앙이란 것은 잡히지 않는 '무지개 끝에 매달려있는 황금항아리'를 찾게 하는 것이고,. the crock of gold at the end of the rainbow
발에 걸려 넘어지게하는 종교(tripper)적 소망 역시 개인적인 욕망적 욕구(oretic urge)였고
유태인의 신(god)은 가신의 신들(household gods)의 하나, 히브리 가신(teraphim)이었다고 말했다.
그 유태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을 같이 믿는 세상사람들을 돌감람나무라 부르지만
사실은 세상의 운명에 격변을 가져오게 하는 버린 사람(the reprobate)들이라는 것.
그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이락인이었고,
하나님 말씀(houyhnhnm)을 발견한 선민(the elect)의 특허권은 메시야 예수님 처형으로 끝났건만
만삭의 유태계 부인이 베들레헴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태어날 메시아, 자기 아들을 기다리는 것은
미가(Micah)의 예언이라기 보다는 토속적 소망이었다.
그들 유태인 자식으로써의 애정(filial affection) 또한 순수한 인류애적 소망이 아니었고 국민으로서의 충성도 거리낌 없는 그 것이 아니었으며
그렇게 믿지 않는 무능력은 다만 안 쓰고 썩히는 것이었다(wrap in a napkin).
^-^, ^-^... ..졸저 멸절의 평화(Endangered Peace or Peter's Principle). 619-620쪽. April 25, 2005 저작권 Txu1-237-125. 이 건 사실. 그런데(이 '그런데'도 쓸만 합니다. 제가 저작권을 주장한 적 업슴니다)
역시 아주 작은 프로 신자들에게도 설 땅이 없다†
보라!
겨자씨만한 믿는 이들을 어지럽히게 하는 대추씨만큼 믿는 이들을!
자!
작은 거인 촬수림★
그 알 수 없는 네 자존심, 믿음의 능력, 말씀충만 은사, 방언 은사, 예언은사로 윗글을 반박하거라.
네 얄팍한 하느님 말씀을 너 좋도록 그릇되게 이용하면서 툭하면 우리 모두를 싸잡아 저주하지 말고.
위에 올린 본명 미우라 지즈꼬를 설득할 말, ☞ 신의 깨끗한 손에 대해 성서적 말씀을 못하면 이 열린마당을 미친자처럼 마구 휘젛지 말거라.
나는 자네가 우리의 메시야가 아님을 증거할 수 있다.
그 마틴 루터, 여의도 맘모스 순복음교회 전 당회장 조용기 목사님과 자네의 신앙고백은 로마교황청에서 편집한 사도신경이요, 나의 기도는 십자가의 보혈로 불쌍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르쳐 주신 '주의 기도문'.
까닭은 나는 신비한 체념을 좋아라고 하며 우리의 종교가 구습을 이어받는 타성의 신앙고백, 그리고 정치와 결탁한 교리의 사도신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려니, ..
내 생각컨데 우리 예수님 말고 어느 누구고 베들레헴에 태어난 머슴애가 자기가 메시야라 선언한다면 사흘안에 돌에 맞아 죽거나 미국으로 도주해 올 것이다.
그, 자기 자신이 메시야라고 선언한 초정통파 유태교 하시드 종파 루바비치파 대 랍비 므나헴 멘델 슈니어슨이 돌에 맞아 죽지 않은 까닭은 뉴욕 브르클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도 잘 모르면서, 간밤의 네 꿈에 나타나신 말씀처럼 네가 무슨 권능으로 우리를 저주하느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