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값아야 되는 두보(자미)의 술값. 겁없이 외상술 먹은 두보는 쉬흔 아홉살에 죽는다.
사람이란 제 정신으로 칠십살 살기 어렵다고 읊조리던 그였다.-곡강시;주체심상행처유, 인생칠십고래희
그 술꾼 중에 백거이(낙천;74세 졸)는 동료 원진에게 구강현 강주 순례(pub crawl)집 술맛이 좋다고 편지썼다.
중국인에게 음주는 향응, 길흉상문-제사 포함하여 글을 짓고 음송하는데 접대수단의 문화생활의 하나로서 술마시는 방법이 6예(藝) 문화를 이끌어가는 한 방법이었기에 술에 취해 고성방가, 고래고래 지르면 처벌이 엄격했음이 시경에 기록됬고, 후한 시절 가륙의 번퇴록 상작주령을 대대로 준수하였다고 기록된다.
그러나 술 마시고 음풍연월함이 주당의 쾌락.
두릉포 쓴 늙은이라며 '소능야노'라 자칭한 두보는 얼큰히 취하여 그 지나간 일, 양귀비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강두'를 짓자, 이 힘도 없는 늙은이가 경국일색을 애모한다고 먼 훗날 소동파(소식)에게 한 방 얻어 맞는다.
이 소동파 역시 주색잡기 좋아하고 길게 키워 꼬부라진 팔자 수염. 이로 보면 지[자기]나 기[그 이]나 매 일반.
사실 두보는 소갈병(당뇨병. 당시에 고황병obstinate illness이라 부름)이 있기에 술을 밝히나 마시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졸따 165+-쪽
하지만 주당이 모여 음풍할 때는 모두 한 통속이요, 취해 신선이 되고, 마시고 싶은대로 마시고, 해 뜰 때 술 서말을 탁배기로 퍼마시기 시작하면 싣고 왔던 수레에 실린 술통을 기울다 쏟아져 나온 재강을 술침을 질질 흘리며 퍼마시고, 취하면 어질어질하나 비록 빈 우물을 찾아 그 속에서 골아떨어질 망정 전설상의 땡초 스님 '노지심'처럼 사방을 때려부시진 않았다.
그리고 한편, 우울증이 있는 도잠(연명. AD 365-427.62세卒)은 술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서 쫒아가서 뒤집어 쓴 두건을 벗어 여기에 술을 걸려 마셨기에 녹주건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5갈래의 머리다발에 고상간귀 오류선생이라 자칭했다.
술을 찾는 사람들은 기가 약해 술의 힘으로 자신의 힘을 가불하다 보면 수전증(hand shaking), 통증을 잊고 흥취가 나오지만 영양실조가 걸려 머리가 해까닥.
벼슬아치가 술김에 백성과 다퉈 곤혹스레 고소당함을 '주송'이라 했고, 술힘을 빌어 나쁜 짓하면 '주망', 정신이 나가면 '주전', 술에 얹히면 '주체', 더 나아가 '주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많았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당들이 벌주벌배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벌주벌배(罰酒罰盃)란 만약에 술 마시고도 시를 짓지 못하면 탁배기 세 말을 마셔야한다는 규칙. 그런데 술을 밥으로 알고 먹고 싶어하는 이태백(이백)은 연회장 예의를 돕는 사정에게 말하여 시상이 떠 오르지 않는다며 벌주를 받아냈다.
그는 일부러 벌주를 마시고 나서야 시를 짓는 시성(詩聖). 그러면서 그가 일어날 때 시 한구절 읊고, 그 한 발짝 걸음이 시요, 무슨 말이고 말을 했다하면 시가 된다.
그가 현종과 양귀비에게 인정받았으나 도무지 이발을 하지 않은 백발3,000척(900미터). 임금께 충성하고 몸이 부실한 황후마마(AD 723)와 귀비(hot baby. 양귀비. 옥환)를 다 배려하는 시를 남긴다.
그러나 술을 임금보다 먼저 홀짝거리고 술마시는 속도가 임금보다 빠르고, 남아있는 술주전자에서 술을 따라 마시자 밀려나게 된 것.
현종(임금)이 이태백에게 "맹한 술좌석이 아니라 주순하는 자리의 음주는 웃사람이 술잔 비우는 분량을 쫒으시요"라고 하명하건만~~난릉미주, 한약 도소주, 마지막 술방울(남미주)까지 기우린다.-백거이;세잔후추남미주
동석했던 황후 올아비 장손석의 술잔이 비었음에도 제 혼자 술마시며 '천하인심' 악부 3장 청평조를 읊었다.
그러자 임금은 무엄한 그의 주도를 탓하지 않고 이태백에게 흰옷 입고 장발로서는 입궐하지 못하도록 명을 내린다.-
그리고 현종의 후사 숙종이 궁전에 내도장을 설치하고 탁발한 원교스님을 내봉공으로 삼자 백거이는 기가 막혀 장한가를 짓는다.-
야심음파일장우, 옥용적막누난간, ~. 7언 120구. 그게 그거 깊이 탄식하는 왕정문란.
그 후 시대적 풍조를 인정하여 덕종 원년(AD 780)에 주세를 없애주었다.
고럼 왕희지 장군은 어땠노~~?
그는 술좌석에서 깍듯이 대접받는 주빈. 진나라 사마예 원제가 명(임명)한 우군장군, 해서, 행서, 초서 3체를 전아한 귀공자풍으로 완성한 문무겹장 호인으로써 명목왕후 오빠 유랑(AD 289-340. 51세卒)과 석숭이 모시고 다녔다.
그 날 그 때,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문무의 시절은 마치 에리자베스 여왕 때 문단동인(coterie)의 술집 인어정(Mermaid Tavern) 처럼 그들이 숭산 준령 은신처 회계산 죽림난정(Canebrake Arcadia)에 들어가 밤이 쪼개지도록 벌주내기로 유상곡수했섰다.
이들 죽림칠현 중에 '완적'은 어땠노~~?
이 분은 명예도 싫다, 사돈맺기도 싫어 일부러 술에 취해 벼슬을 내놓으려 한 분. 그 오장원싸움에 제갈량과 붙었던 사마중달(후일 '선제'王) 시절. 직위는 종사중랑.
그 후 문제(사마 소) 때 시퍼런 칼창에 대장기를 펄럭이며 전군을 지휘하는 대장군. 다시 종사중랑을 시키면서 사돈을 맺으려고 집으로 두달 간 만나러 왔건만 술독에 빠져 인사불성, 가끔 헛소리. 이 건 가짜 헛소리였다.
까닭은 불확실성 속의 사마씨 왕통이 오래 지탱할지 의문이 나기에 그 문제의 맏아들 염(후일 무제王;236-290. 54세卒)을 사위로 삼고 싶은 맴이 영 없섰던 까닭.
그러나~~ 술통이 어디 어느 곳에 여러개 있단 말을 듣고는~~ 냅따 말타고 달려갔다. 술에 취해 미친 척하려다 중독이 됬뿌럿따!
그 술통! 이 것이 '보병주 저장실(bustery)'에 술 300석 술곳간(bodega)에 감춰져 있단 말을 듣고, 헛소리를 연거퍼 하던 그 연극을 집어 치우고 벼슬을 내놓고는 술통 뚜껑을 열고 기우려 마시기 시작하더 이 번에는 진짜진짜로 헛소리한다.
하지만 그는 난세에 폭음으로 생명을 보존하며 80편의 시를 남긴 죽림칠현의 한 사람.
그러나 그 후 소왕(王)이 완적을 백의종군시킬 수 없기에 보병교위로 제수한다.
그 여포, 동탁, 육손, 장비, 와룡-봉추 삼국시대 이후로 '서막'이란 사람이 음주문화를 논함에 '누구든 술 마시고 맑으면 성인이요, 탁하면 현인'이라 평했기에, 고럼?, 도사와 처사를 '어떠케' 놀려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