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2010년 3월 13일), 이곳 '열린마당'에 본인 禪涅槃(선열반)이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라는 글을 발표했었읍니다. 그 댓글에서 Doc Ja라는 분이 "우주도 물질계와 비물질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물질계가 물질계를 지배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무엇을 지배하려면 상호작용하여야 하고, 상호작용하려면 접촉하여야 하며 접촉하려면 경계면이 있어야 하는데 물질계와 비물질계의 접촉면에서 일어나는 기작(mechanism)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라는 질문을 던졌읍니다. 그 답변으로 DKP선생께서 이런 댓글을 올렸읍니다.
"법문에 지혜가 제일인 사리푸타가 無我(무아)의 경지에 대해 여쭈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답을 주셨습니다. 지금 '독자'님이 여쭙는 내용이 비물질(非物質)계 이념(理念)계와 물질계 실제(實際)계를 여쭙는 거라면 사리푸타 경지 입문이니 '독자'님이 대단한 겁니다. 대립저항하는 가치의 양계면의 경계선 알키메데스 점(点), 지렛목을 포함시켜 주십시요. 그런데 전(前)에 파자(破字) '색사소녀(色絲少女)'를 '절묘(絶妙)'라고 융합(融合)한 양수(楊脩)로 생각하시지 마시길 여쭙니다." (아래 참고)
이런 댓글의 해석은 本人(본인), 禪涅槃이 가늠해서 말하려던 意中(의중)을 앞질러 말씀하셨기에 "色卽是空(색즉시공)의 출처와 의미를 먼저 짚어보고 나서, 내가 본래에 생각했던 認識(인식)의 문제인 "無意識(무의식)의 영역"으로 넘어갈 작정입니다. 이 글귀는 佛家(불가)에서 우주의 時間(시간)과 空間(공간)의 문제를 다루는 유명하고도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선 그 출처를 말씀들이면,
般若心經(반야심경)에 나오는 글귀로써 당나라 삼장법사인 玄裝(현장)이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心經)의 요점을 간략하게 번역한 짧은 경전이지요.(모두 260字: 아래 참고2) 識者(식자)들이 宇住(우주)의 "時(시)와 空(공)"의 問題(문제)를 풀이할때 이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글귀를 자주 인용합니다.
앞의 色卽是空(색즉시공)이란 표현에서 色에서 空으로 가는 意識過程(의식과정)은 노-장의 道敎(도교)에서 말하는 虛(허')의 有用性(유용성)을 깨닯는 순서이며, 뒤의 空卽是色이란 말은 空에서 色으로 가는 과정으로, 인식의 無我(무아)의 공(空)을 말합니다, 즉 양쪽이 다 虛(허) 즉 "비었다"는 의미이지요. 최근에 入寂(입적)하셨다는 法定(법정)스님의 말씀에 有(유)와 無(무)의 사상을 운운하는데, 바로 이에 근거한다고 나는 봅니다.
이런 개념은 어디서 나왔나? 어제 'Mike Choi'란 분이 "아~ 싸끄럽다"라는 글에 본인이 이런 댓글을 달었었읍니다.
"曰(왈) 즉 가로되, 원래 無(무)라는 개념은 인도 힌두교에서 유래했읍니다. 역사 이래로 아랍상인들이 인도양을 건너다니면서 인도와 무역행위를 했었지요. 이들이 힌두교의 無, 즉 0 라는 숫자를 도입함으로써 국제무역행위에 혁명이 일어났었읍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까지 전달되어 지금 computer의 2 進法(진법)의 혜택을 보고 있오이다. 중국에서 空(공: 빌공)이라 하여, 老子(노자)의 道德經(도덕경)에 "속이 비어야 쓸모가 있다"는 서술이 있읍니다. 요새 말하는 "마음을 비우라"... 사람도 속을 비워야 天氣(천기)를 감지한다는 그런 道敎(도교)의 개념과 인도에서 수입된 無의 개념이 相通(상통)하여 禪佛敎(선불교),요즘의 Zen buddism으로 이어지지요."
그 쓸모라는 말을 道德經(도덕경)에서 인용합니다. 三十輻共一'곡'(수레바퀴통 곡) 當基無 有車之用(당기무 유타지용)... 고대漢字(한자)임으로 한글로 직접 해석하자면, "30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통에 꽂혀 있으나 그 바퀴통의 빈것 때문에 수레의 유용성이 있는 것이며, 찰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드나 그 가운데를 비워야 그릇으로써 쓸모가 있고, 문과 창문을 비게해야 그 방안의 공간이 쓸데가 있다. 그러므로 有로써 이롭게 하는 것은 無로써 그 용도를 다하는 것이다." <참고: 盧台俊 譯解(노태준 해역) '신역 道德經(노자), 55페지>
그러나 만일 '색'이 '공'일 뿐이기만 하다면, '존재'에 대한 인식 자체뿐만 아니라, '색'이 '공'이라고 인식되는 그 의식과정 자체도 이루어질 수 없오이다. 고로, '공즉시색'이란 말과 서로 견제되어야만 말이 됩니다. -제2편에 계속-
왜냐하면, 색즉시공'이란 말에는 중요한 두 개의 개념이 적용된답니다. '시간'과 '변화'라는 개념.... 영겁의 시간을 최대로 할때 우주가 변화하는 세계가 되며, 의식은 순간에만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곧 공(空)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한色(색)이라는 세계를 無限(무한)으로 놨을때, 우리 인간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거의 공(空)이나 다름 없지 않겠오?
그래서 '色卽是空(색즉시공)'이란 말은 '空卽是色(공즉시색)' 이란 말과 共存(공존)해야 하는 이유가 있읍니다. '순간'에 대한 인식도,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泳遠이란 瞬間'(영원이란 순간) 以上(이상)의 영원성을 깨닯을 때라야 만이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또 나를 포함한 세상을 가늠할 수 있다... 色卽是空에서 '色을 空이라 하면 세상을 부정함으로, 다시 空이 곧 色이라는 긍정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결국 色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은 처음의 色과 마지막의 色은 같은 色이지만, 처음이 인식의 否定(부정)이요, 나중이 삶의 肯定(긍정)이기 때문이지요.
내 자신이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를 알아채기가 매우 어려운 일임으로, 인간의 의지로 다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정할수밖에 없을 뿐입니다. 다만 끈질지게 수양해 나가는 것, 이것이 한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고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향하여 "저들이 제 하는 일을 모르는도다" 즉 "모른다는 죽음의 無에다가 생명의 부활이라는 有를 창조하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누가 "마음을 비우라"고 했던가?
禪涅槃
참고1:
양수(楊脩, 175년 ~ 219년)는 중국 후한 말기의 군웅 조조의 모사이다. 자는 덕조(德祖). (한국의 홍농 양씨)
양수의 집안은 “사세대위”라고 하는 명문가이다. 전한 초기때의 유방의 신하였던 적천후(赤泉侯) 양희와 소제(昭帝)때의승상 안평후(安平侯) 양창의 자손이며, 양진의 고손, 임진후(臨晋侯) 양사의 손자, 한나라 태위(太尉) 양표의 아들이다. 가족으로는 아들 양효, 손자 양준이 있다. 어머니는 원술의 여동생이다.
양수는 삼국지에서 머리가 좋기로 유명하다. 그것은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하루는 조조와 양수가 같이 여행을 하던중 강남에서 효행의 상징이자 수신水神이 된 조아曹娥의 비석을 지나가다가 비석에 쓰인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韲臼’ 여덟 글자를 보고 양수에게 해석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양수가 대답을 했다. "알고 말고요." 그러자 조조는 양수에게 말하기를, "가만히 있게나. 내가 그 뜻을 알 수 있을때까지 말하지 말게." 조조는 그 뜻을 곰곰히 생각하며 걷다보니 어느덧 꼭 삼십 리를 걷게 되었다. 조조는 겨우 그 뜻을 알아내고는 종이에 그 뜻을 써서 양수에게 건네주며 양수 또한 그 뜻을 적어보라고 말했다.
“黃絹色絲也, 於字爲絶. 幼婦少女也, 於字爲妙. 外孫女子也, 於字爲好. 韲臼受辛也, 於字爲辭. 所謂'絶妙好辭'也
해석하면, 황견은 색실을 말하는 것이니 글자로는‘절絶’이 되고, 유부는 어린 여자를 말하니 글자로는 '묘妙’가 되며, 외손은 딸의 아들을 말하니 글자로는 '호好'가 되고, 절구통은 '고통(辛)를 받는 것(受)'을 말하니, 글자로는 '사辭'가 됩니다. 그러니 이들을 모두 합하면 ‘절묘호사(絶妙好辭)가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絶妙好辭는 뛰어나게 좋은 글을 이르는 말이다.>
-제3편에 계속함-
조조는 자기의 재주가 양수에 미치지 못함을 감탄하며 양수에게 말하기를, "나의 재주는 그대 보다 삼십리를 미치지 못하는구나." 라고 말했다.
참고2:
<반야심경>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가장 많이 송독하는 불교 경전이다. 본래 인도의 범어로 전해오던 것이 여러 나라에 퍼지면서 다양하게 전파되었다. 특히 649 AD년에 현장이 황제의 조칙을 받고 종남산 취미궁에서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은 공(空) 사상으로 대표되는 600권의 반야경전을 260자로 요약하여 돈탈 정각의 대도를 설교한 대표적인 경전이 되었다.
<반야심경>의 원제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마하’는 크다 · 많다 · 뛰어나다 · 초월하다의 뜻이고, ‘반야’는 지혜 · 깨달음의 뜻이고, ‘바라밀다’는 저 언덕, 곧 열반(涅槃)에 이른다는 뜻이고, ‘심’은 핵심 · 진수이고, ‘경’은 성인의 가르침이자 피안으로 이르는 길을 뜻하니, 곧 ‘큰 지혜로 열반에 이르는 부처님의 진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불교의 종지를 깨닫는 지름길은 바로 <반야심경>에 있다고 한다. 반짝거리는 지혜와 총명을 얻어 근심 걱정이나 번뇌 고액이 없는 청정무구한 열락의 경계에 들어가는 길이 바로 260자의 <반야심경> 경문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Wikipedia에서 인용함- 2012-12-27 1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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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Bin Kahn (ID:hesse) [ 2012-12-27 22:33:46 ] Perfect! 제가 찾고있던 Truth! Including 댓글
6 Daniel Kyungyong Pa (ID:dkp) [ 2012-12-27 19:03:32 ] 그 '큰¹ 지혜²ㆍ도피안³'을 마하¹반야²바라밀다³심경(心經)'이라 한다면 첫 구절에 '色즉시공 공즉시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여기까진 잘 아시며, 이 다음 제 의견을 넣을 때, 수상행식(受想行識)이랄 때에 '색'은 물질, 육체, <정(精)!>이요, '수ㆍ상ㆍ행'은 정신적인 <신(神)!>. 여기까지 <정신>, 그리고 '식(識)'은 영혼 즉 <영(靈)>이니, 정신+영+기(氣)하면 생명이 됩니다.
5 Daniel Kyungyong Pa (ID:dkp) [ 2012-12-27 17:43:25 ] 그 다이아몬드같은 말씀을 기록한 금강경의 엄마격인 큰 지혜서를 여인 관세음조보살의 설법인 줄 잘 아시고 있는데, 이 것과 유마보살의 말씀이 석가여래=부처님과는 다른 각도로 쓰여진것이랍니다. (이런 제기랄 제자가 스승보다 낫네.-청출어람, 빙한어수) .
관음보살은 여인이기에 '나는 이 제부터 부처님이다!'라는 자격이 없지요.
까닭은 잠자리에서 남자 밑에 깔리는 주제에 5가지 막힘(5障)이 있어 5가지 계급을 못 갖습니다라고 정했지요. 허 3천포로 내사 빠집니다요 ㅎ
1.부처라고 선언말고 보살로 그쳐랏!
2, 3. 4. 5. 범천왕, 제석천왕, 마왕(염라대왕), 전륜성왕 ☜ 꿈도 꾸지마라!
4 Daniel Kyungyong Pa (ID:dkp) [ 2012-12-27 17:09:44 ] 그 금강경 꽁지에, ..이 세상에 있다고 하는 것들을 가만히 보면 꿈과 같이 사라지며, 환상인 것이 마치 물거품 그림자 같은데, 그 물거품을 없다고도 할 수 없겠고, 이슬같고 번갯불같이 곰방 사라지니, 있다고도 할 수 없고 도대체 홀연히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지니 현상적으로는 있는게 분명한데 실체적으로 보면 오래 머물러 있는게 못되더라는 겁니다요. 즉 있다 없다 한 쪽에 쏠리며 생각말란 말입니다.
3 Daniel Kyungyong Pa (ID:dkp) [ 2012-12-27 17:00:54 ] 부처님은 '없다'(무無)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시는데 중국에 마땅한 말이 없기에 노자 도덕경 11장 마차바퀴 가운데 빈구멍을 불법에서의 '없음'인가보다라고 한동안 오해했더랬지요
2 Daniel Kyungyong Pa (ID:dkp) [ 2012-12-27 16:45:07 ]
문兄.
이 글은 항문[學問]이 깊다고 해서 알아 듣는 게
Daniel Kyungyong Pa (ID:dkp) [ 2012-12-27 16:45:07 ]
문兄.
이 글은 항문[學問]이 깊다고 해서 알아 듣는 게 아니지요.
꾀, 슬기!
즉, 바람이 불어 밀려가는 파도가 그 앞에 가만히 있는 물을 치며 물거품일 때, 이 거품을 있는 것이랄 수도 없고, 없는 거랄 수 도 없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생각하라는 게 공사상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해당없고, 금강경 꽁지에 설명답이 있지요.
1 poknok mun (ID:munpoknok) [ 2012-12-27 16:30:14 ] 박사님 2번을 내리 읽어 보앗어나 아직도 문맥이 제대로 통하지 못합은 워낙 미천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말앗지만..나름대로 저 산 마루을 보아라 바위을 보아라...그리고 경복궁을 보아라 내가 지어논 움막을 보아라..마땅히 존경도 받고 영원불멸할만하지 안는가 ...내가 가꾼 배추 한포기 이게 예사것이드냐..곡식 낯알한개..이또한 버금갈만한 것이지..고로 사람이야 짐승이야 더 할말이 잇겟는가 움직이는 별레 까지도 나는 존경을 하노라...누가 나한테 제법 좀 안다고 한잔술에 취해서 주절된 말이지만 나는 이곳이 나의 삶의 기본으로 생각한지가 오래입니댜..죽이자 마라 생물이다 나무든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런내가 사람죽이는 기술자로 15년을 철없이 목줄을이엇어니..평생의 한국애국자요 결국은 자자 자찬으로...고로 삶이란것이 요상합니다..이래 골치가 ..좀 쉬어야겟다..박사님 안녛하십시요 내년 에도 좋은일 개속 부탁합니다..좋은글인데...